이란유목민 후예들 이야기를 보면 사람들의 상관관계가
돈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구나
싶습니다.
그들은 염소나 양을 키워서
새끼를 낳고 그래서
돈이 꼭 필요하면 한두 마리 팔아서 그 돈으로 씁니다.
집이라고 지금에 와서 예전 우리 세대가 시골에서 큰 마을에 초가집보다는 큰 기와집이 한 채씩 있었습니다.
그런 집에서는 자식들을 부산이나 서울로 보내서 대학까지 졸업시켰고.
그런 집은 승승장구했습니다.
동네일에 큰돈이 필요하면.
부산의 큰아들에게 알리고
큰아들은 동네로 와서 거금을 내어 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5일장이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저가 초등고학년 때도
시골5일장이 있었습니다.
시골 오일장에 쌀을 대두 한말
가지고 가서 팔아서 그 돈으로
찬거리도 사 오고 아이들 학비도. 옷도 등등
또 벼추수가 끝나면 매상이란 것이 있어
그곳으로 벼를 보내서
목돈을 쥘 수 있었습니다.
또 누에도 키워서 공매장에
내고.
담배농사도 지어서 공매장에 내고,
그리고 6.25 전쟁 후 큰 도시에서는 공장이
들어서고 그 공장들이
일자리가 되고 월급이란 것을 받아 생활비를 아끼면.
자식들이나 남자아이들을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또는 대학까지 공부시켜
소위 출세란 것도 했습니다.
이란유목민 후예들은
남의 집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들끼리. 또 일거리가 많으면 사촌들끼리 서로 돕습니다.
사촌들도 같은 형제 지내듯 합니다.
오늘은 아버지대의 사촌들이니 조카에게는 아버지형제도. 아버지 사촌형제도 한 집안입니다.
아버지 사촌인 삼촌이 도시로 어린아이들까지 태우고
도시로 나와서는 차를 고친다고 승용차가 있는
조카를 불러 자기 대신 일을
부탁했고,
점심때는 와서 자기 가족과 조카의 점심도 사주었고.
내가 아직 집에 못 가니 우리 식구 데리고 우리 집에
까지 데려다 주라고 부탁했고,
집에까지 데려다 주니
자막으로 안내가 안되어서.
보기에는 쌀이 40Kg 넘어 보이는 포대 하나,
또 그것도 콩류로 보이는
작은 포대까지 숙모가 주면서
오늘 고마웠다 하는듯했습니다.
그 댁은 초, 중등 학생이 세명이나 되고.
그 조카는 대학을 올해 졸업한 듯했고.
앞으로 교사 시험을 쳐서
교사가 되겠다 했습니다.
대학교도 보냈으니.
젖소 한마리에서 우유를
짜서 또 그 아버지는 가끔
어디 일하러가는듯했고,
최선으로 살아도 앙식도
떨어질 때가 있을겁니다.
사는 형편이 어려우니
도시에서 자기 가족들과 식당의 점심밥도 먹게 해 주고
자연스럽게 가족들을
집에까지 데려다주게 해서
양식을 실어주고,
이란유목민후예들은,
서로서로 챙기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나라도 우리 부모님 대까지는 돈은 너무도
귀해서 형제들은 서로를 챙겼고.
어쩌다 남자아이들이 공부를 하게 되면 도시의 사촌형집에서 같이 살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도 면사무소가 있는 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중학교는 외가가 있는 군청이 있는 곳에서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이후는 부산에서 살았습니다.
이란유목민 후예들도
아주 가난해서 밀가루도.
쌀도 없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집에는 친척이 아니어도
가서 일을 돕고,
또 반대편에서는 먹는 것을 나누어 먹더라고요.
저가 집성촌에서 초등고학년을 살지 않았다면 지금도
이해가 안 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저가 초등고학년을
시골집성촌에서 살았던 것을
제 인생에서 황금기라 생각합니다.
부산에서는 초등1학년 입학해서 1~2개월 다니고
신장염이 들어서.
장기간 치료 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입학을
두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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