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는 받으실 형편 못되는데
전화가 오면 불편하시겠다
싶어서 전화를 잘 드리지 않는다.
건강을 여쭈오니 그럭저럭
병원 가지 않고 지낸다 하셨다.
그때가 오전 10시경이어서
요양보호사가 집에까지 도착할 시간도 아닌데.
기사가 왔다고 하시더니,
그만 전화가 끊어졌다.
볼일이 끝나셨는지
내가 고칠 것이 있어.
불러서 기사가 왔었다고 전화를 끊어서
미안해라고 카톡이 와 있었다.
내 조카가 이해하겠지 하시고
그런 카톡이 없었으면 하는 맘이다.
아흔하나이 신 어르신이시다.
4월에는 식사 한번 해드리려고 다 준비했었는데.
분당의, 울산의, 대구의 조카들이 가겠다 하니.
너희 오면 밥은 한 끼니 사 주께로 하시더라는 분당언니의 말에
내가 가지 말자고 했다.
그렇게 조카들과 웃음꽃이 피고 식당밥이 아닌 식사도
하실 기회가 없어졌다.
이제 만나는 것은 멀어졌고.
전화도 하면 바쁘다 하시더니,
그 연유가 요양보호사가 참
내게 잘하는데.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고.
와서 일하는 동안 나와 대화를
나누는데.
내가 전화기 잡고 그를 일만 하게 할 수가 없다고.
우리 세대는 거의가 5남매 형제가 많았다.
이모님이 막내이셨고.
늦게 결혼하셔서 3남매
딸 둘에 막내가 아들인
참 보기 좋은 가족이셨다.
그러면 뭐 하느냐고?
아들이 우리나라를 움직이는
100인 중의 한 사람이면.
저그 아내가 좋지 부모에게는
뭐가 좋으냐고?
그 이종동생들이 나쁜 것이 아니고 세태가 그런 것이다.
그 이종동생들은 나를 참 좋아했었다.
큰 아이는 언니 결혼하고.
내가 한동안 울었다고.
내가 고등학생 때 3살 아기였고,
내가 가면 벽에 큰 세계지도가
붙어 있어서 안고는,
나라들을 짚으면서 나라 이름을 읽어주었는데.
어느 날 안고서 나라이름을 물었더니 손가락으로 짚었다.
결혼하기 까지 이종 어린 동생들이 보고 싶어서
일요일이면 자주 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