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가치관의 혼돈

이쁜준서 2011. 2. 8. 14:01

50년대  정말로 가난한데, 아이들 엄마까지 저 세상으로 보내고 삼남매의 아버지는 자식들과 함께 잠잘 집도 없었고,

그 아이들은 뿔뿔이 남의 집 심부름하는 곳으로 누군가가 데리고 갔고, 그 아버지는 소식도 없었다 했습니다.

그리 세월이 가고, 큰아들은  떠돌이로 남의 집 일을 하면서 장성했고,  밥 먹는 것은 해결 되어 살고 있을 때,

 

큰 딸은 15세에 시집을 보내고,

남편은 돌아가시고, 몇번의 아들은 낳았지만, 아기적 없어지고, 하나 간당간당 키우던 아들아이가 남편이 돌아가시고, 또

저 세상으로 가고 미친듯이 딸아이 하나 없고 고향땅을 떠나 떠 돌다 무당이 되고부터 정신이 들어 그 딸아이가 자라서 결혼을 할

나이가 되었고, 아들이 없으니 데릴 사위를 볼려 했고, 그 데릴 사위를 바로 위 사정의 총각과 결혼을 시켰지요.

그 총각에겐 그 당시 아버지가 떠돌이로 살고는 있다 해도, 시가쪽은 챙기지 않아도 되는 혈혈단신이었기에 사위감으로 택한 것입니다.

무당인 그 장모 되시는 분은 기가 대단하신 분이셨고, 그 사위는 또 장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는 기 한번 펴지 못하고 살았다 합니다.

 

도시의 작은 집 방두칸짜리 집엔 장모님 방은 조금 크고, 큰방과는 미닫이 문으로 통하고, 출입문이라고 있는 것은

정지간으로 통하는 햇빛도 통하지 않는 골방살이를 딸내외가 했었지요.

명절이 되면, 처가쪽 제사를 걸지게 차려서 지내고, 난 뒤 그 골방에서 처가쪽처럼 제수도 다 차리지 못하고 죄 지은 듯 자기 부모님

제사를 지내고 살아 왔지요.

그러다 아이들이 장성해지니 작은 집을 사 분가를 했고, 몇년 살다 장모님은 돌아가시고, 남은 작은 집이랑, 현금은 다 차지하고서는

윗대 제사는 몰라도 처부모님 제사는 지내겠다 하더니, 그동안 기 펴지 못하고 살아 온 것의 분풀이라도 하는 듯

두번 지내고는 제사도 던져 버렸습니다.

 

오늘 어떤 글을 읽었습니다.

아들이 없는 자매들이 있는데, 둘째 딸이 친정아버지 기제사도 명절차사도 지내겠노라 시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그리하라고 허락을 했고, 그 딸은 시댁 조상님 차례보다 다른 방에서 친정아버지 차례를 먼저 지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해가 가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친정아버지 기제사도, 차사도 제대로 지내지 못한 한이 얼마나 깊었을지를 생각하면요.

그러나,

먼저 지내는 것에 그리 의미를 두었다면, 일단 시댁차사를 먼저 지내고 친정차사를 지내야 된다 생각합니다.

 

저도 시댁에서 맏이 입니다.

시아버님이 저가 결혼 해 왔을 때 돌아가신 뒤였고, 시어머님의 연세는 그 때 마흔 다섯이셨습니다.

밥 솥에서 시어머님 밥을 제일 먼저 퍼면 시어머님께서는

집안의 대주 밥을 먼저 퍼야 한다 하셨지만, 저는 늘 시어머니 밥을 먼저 펐습니다.

결혼 할 때 친정어머니가 당부하신 것은 언제나 시어머님을 먼저 챙겨 드리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 칭호를 아이들을 빙자해

할머니라 부르지 말고, 어머님이라 불러 드려라 하셨지요.

팔순이 넘으신 시어머님이시지만, 어머님이라 부르지 아이들 이름을 부르고라도 누구누구 할머니라 부른적이 없습니다.

남들과 이야기에서도 우리집 할매라 부른 적도 없습니다.

 

70년대는 요즘보다 그래도 칼치가 헐했습니다.

고등어보다는 비쌌지만, 먹을만한 크기의 칼치가 때때로 헐하기도 했고, 그러면 칼치를 사다 무나 호박 넣고 찌져 먹기도 하고

아주 더 큰것을 사게되면 연탄불에 석쇠에 구웠지요.

그러면 맨 윗토막 창자를 꺼낸다고 배가 터진 것은 시어머니나 남편을 드렸고, 그 다음토막과 그 다다음 토막은

큰시동생, 작은시동생을 주었습니다.

배 터진 것을 먹지 않으려 하는 시동생들을 그리 거둘 수 밖에 없었고, 사과와 고구마가 작으면 화단으로 던져 버리고 먹지 않으니

더 큰것은 시동생들 몫이였습니다.

 

시어머님이 남편보다 중한 것도 아니였고, 시동생들이 남편보다 더 사랑스러워 그런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도리이기도 했고, 시동생들도 다 형제이고 내 가족이었기에 그렇게 살아 진것입니다.

준서할미가 특별해서 그런것이 아니었고, 다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세상은 가치관의 혼돈으로 선도 후도 제대로 없고, 아래도, 위도 없고, 일단 기분에 맞는대로 살아 갑니다.

친정아버지 기제사도, 차사도 지내라는 시어머님은 참으로 후하신 분이시고,

시댁 차사보다 먼저 친정차사를 지내는 것이 기분이 좋다면 당연 시댁어른들 차사를 먼저 지내야 한다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매사에 이렇게 가치관의 혼돈으로 살아간다면 살아는지는데, 준서세대들까지 가면 기준이 없는 사회가 될겁니다.

분명 하늘은 땅이 있어 하늘이 위에 있는 것일겁니다.

동갑인 준서에미는 자유롭게 살아도, 준서아빠를 윗질로 대접은 해 줍니다.

어떻게 사는가?  싶어서 준서에게 물었습니다.

아빠가 엄마를 이긴다 했습니다.

잘 살고 있구나...... 친정에미인 준서할미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준서는 외할아버지가 준서할미에게 이긴다 생각합니다.

실제도 지고 살고 있습니다만, 실상은 져 주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야 가정의 질서가 서지요.

 

예전의 가치관은 버려지고, 새로운 가치관은 바로 서지 못한 혼돈의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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