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본보기가 되지 못하는 어른들.....

이쁜준서 2008. 4. 13. 11:51

 

 

나의 오랜 친구들, 아직도 한달에 한번을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1970년도, 전기 밥솥이 처음으로 나오던 그런 시절에 만났으니, 내가 시집 갔을 때 그 동네엔

냉장고가 있는 집이 없었다.

TV 가 있는 집은 없었고, 만화방에서 문을 열어 놓고 어른, 아이들이 TV를 보던 시절에 만났다.

이젠 전국이 평준화(하하) 가 되어 시집가는 신부가 장농, 침대등의 큰 살림살이를 비롯해 티스픈,

포크까지 해 가지고 가는 세월이지만,

그 때는 경상도에서는 장농은 신랑측에서 하고, 서울에는 장농도 색시가 해 가는 풍속이었다.

자잘한 살림살이를 신부가 장만해 갔고, 시갓댁, 시외갓댁의 어른들 한복감을 넣고, 버선 10켤레 정도,

남자 양말 10켤레 정도를 넣어서 갔다.

그 때 내가 해간 한복은 모두 드라이를 해야하는 좋은 양단이었는데, 시골 외갓댁에서는 물빨래를

해 쪼그라 들어서 입지도 못했다 했다.

결혼 후 몇개월 있다 시외버스를 타고 간 시외갓댁에서는 새로 온 색시가 미안할 정도로 그 양단

한복감을 타박을 했었다. 하 하 하

 

1~5년 차이를 두고 우리 7명은 결혼해 와 그 동네에서 아이들 낳고, 시어른들 섬기며, 그렇게 만났다.

그렇게 살면서 기추란것을 모았고, 한 달에 한번 식당에서 만나 점심도 먹고 그렇게 지낸게, 30년도

넘었다.

나만 부산이 친정이지 다들 경북 일원에서 시집을 왔다.

남편들의 직업도 가지 가지 이다.

그런데 그 일곱집의 자녀 총 18명이 다 반듯하게 자랐다.

아버지가 자기 하고잡은대로 살았는 집 남매는 그 엄마를 그렇게 섬긴다.

횡폭한 아버지 때문에 엄마를 두고 결혼하기를 망설였던 딸아이도 우연스레 상대를 만나 결혼을

했는데, 그 쪽 시댁에서는 형제도 많고, 형제간 정도 도타운 집인데, 어찌 저런 복덩이가 우리집에

왔느냐 하고, 그 사위는 매일 장모께 전화를 한다 했다.

장인 보라고 그러는지 처갓집에라도 오면 장모를 업어주고 간다고 했다.

아들도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고.

 

아들아이들은 키우면서 시골길의 울퉁불퉁한 그런 길처럼 아버지를 속이고 때론 방패막이도

되어 주어야 할 때도 있었지만 모두들 잘 컸다.

이젠 1세대 할머니인 준서할미와 몇몇은 듣고, 2세대 할미들이 핸편에 손자, 손녀들의 사진을

넣어와 자랑을 한다.

두달 전에는 그 중 막내가 손자를 보게 되어, 기추에 오면서 과일을 사오기도 했다.

하늘에 감사함을 또 반가워 해줄 친구들이 고마워 그렇게 과일을 준비해 와 나 손자 봤어요 하는 거였다.

 

부모들이 반듯하게 살아야 자녀들이 바르게 큰다.

스스로들 공부해서 나름대로 자리 잡아 자녀를 낳아 부모도 되고 그렇게 산다.

모임 회원 7명이 키 차이는 있어도 눈높이는 비슷 비슷해서 다들 또 그렇게 비슷비슷하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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