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 늦은 가을에 친정 백모님께서 돌아가셨다.
그 때는 벼농사의 가을이 늦었다.
음력으로 10월에도 추수를 했으니 말이다.
음력 10월 초닷새인데 어른들은 초상집으로 다 모였고, 나는 소를 먹이러 논둑으로 갔었다.
우리 또래들은 모두 소를 같은 곳으로 가 먹인다.
소는 논 뚝에서 풀을 뜯고,우리들은(3~4명) 우리들대로 논다.
그런데 발목까지 찰랑찰랑 차는 논바닥의 물에는 바람에 작은 동그라미가 일고, 그 작은 동그라미
속으로 물을 보니 논 고둥이 보인다.
어느 넘은 몸체가 보이고 가만히 보니 숨어 있겠다 싶은 자국이 많이 보였다.
그래서 집으로 가 그 때는 귀했던 두레박을 할려고 두었던 깡통을 들고서 논으로 갔다.
그 때는 프라스틱 소쿠리가 없었고, 뭣을 담을 것은 짚으로 만든 그릇이나, 옹가지 그릇
어느집에선 나무조각으로 만든 설겆이통만 있을 때였다.
서너명의 친구들은 다 집안 아이들이었고, 내겐 다 고모뻘이었다.
우리는 다 같이 신을 벗고 논으로 들어가 고둥을 주었다.
그런데 어찌나 고둥이 많았던지 깡통으로 하나 가득 하고도 더 많이 잡았다.
한 두어 깡통이나 잡았었지 싶다.
몇집 아이가 잡았어도, 어른들은 초상집으로 다 모여 있고, 부산으로 가 살았던 친척들까지도
와 있어 초상집이라고 하나 잔치집처럼 부산스러웠다.
들에 있는 나물을 뜯어 와 정구지(부추)도 넣고, 쌀가루를 고춧가루와 함께 꾹꾹 찧어 넣고,
들깨도 넣고, 걸쭉하고 건지가 많은 국을 솥을 걸어 놓고 끓였다.
우리들에게도 한 그릇 돌아올만큼 국은 많이 끓였고, 고둥이 많았고, 국 맛은 그리도 맛있었다.
고향에 나가 부산에서 오신 아저씨들은 특별히 더 맛나 하셨다.
내가 커서 -결혼전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큰엄마는 돌아 가셨는데, 많이 주울수 있어 신이났던
철부지의 내가 철이 없어 웃었다.
아무도 왜 고둥을 주웠냐고 야단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때 처음으로 돌아가신 것을 보았고, 초상을 치루었던 모습도 보았고, 상여가 집에서 나가면서
사용하시던 요강을 깨던 것도 보았다.
참 오래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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