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옛 풍습

이쁜준서 2006. 12. 19. 01:35

이제는 없어진 풍습이다.

내 고향은 내가 결혼 했을 때 까지도 전깃불이 들어 오지 않아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산소에 성묘하러 새신랑과 함께 갔을 때도 새 사람이 왔다고 촛불을 켰었다.

그런 시골이었지만 다행히 동해남부선이 마을 앞으로 다녔기에 그 동해남부선은 큰 도시와(부산) 연결도

되게했고, 기차는 시계 역활을 하기도했다.

어느 기차가가면 저녁 지을 보리쌀을 삶기도하고, 어느 기차가 가면 새참을 내 가야하고,

또 기차길은 어디론가 갈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기도 했다.

학교가 십여리 길이여서 집에서 출발 할 때는 기차길로 가다가 국도와 기찻길이 만나면 한길로(국도) 또

기찻길이 만나면 한길로나 기찻길로등 우리들은 하하 호호 웃으면서 학교 가는 길을 갔다.

철길로 가다가는 그 옆의 산으로 올라 토끼를 쫓기도하고, 도라지를 더덕을 캐기도, 진달래를, 망개를

계절따라 우리를 반기는 산은 달랐다.

 

그 때는 집안(같은 성씨가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기에) 어른들을 섬기는 때라 설날 음식을 다 해놓고

저녁까지 먹고는 단술(식혜)과 담은 술을 들고, 머리에는 술 안주 될만한 음식을 조금씩 담고는 등불을

들고 섣달 그믐 밤에 집안의 어른들(아주 연세가 높으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드리러 다녔다.

그 때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등불과 술병은 내 차례였는데 코 끝의 싸늘한 공기와 어쩌다 엎어질 뻔한

돌부리등 지금도 생생하다.

아마도 그 때의 인사가 올 한해 잘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란 내용이었는데 정확한 인사말은 기억이 안난다.

설날에는 설날 차례를 다 지내고 또 음식을 차려서 인사를 갔었는데, 한 해가 끝나는 섣달 그믐 밤에 음식을 들고서 인사를 갔다는 것을 도회지에서 살았는 사람들은 모를테다.

그 시절은 참으로 인간이 인간다웁게 살았던 것 같다.

 

지금은 노인네들이 주는 밥 먹고 가만히 있을 자리만 있어도 고마운 세월이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의 풍습이었는데, 시어머님을 비롯해서 양가의 어른들이 다 들 계시는데 이렇게 세상이 바뀌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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