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오감이면 어떻고 대봉이라는 이름으로 박스에 담겨져 오면 어떻겠는가?
내가 자란 고향집에는 도오감처럼 생긴 단감이 있었고, 주변 논뚝, 밭뚝에도 간혹 도오감이 있었다.
우리 단감은 크기도 컸고, 감즙도 많아서 하나를 먹어도 어린이의 배는 불렀다.
손 끝을 호호 불면서 소를 먹이다가 서리가 온 뒤의 도오감 (떫은감) 을 하나 따서 돌에 얹어 놓고 주먹으로 탁 치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소 먹이던 아이들이 떫어면서도 단 도오감을 먹었다.
남의(타인) 것이라 각자 하나씩 따지 않았는지 떫어서 하나 먹기에는 많아서였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나를 먹고 또 더 먹고 싶으면 또 하나 정도 더 따 먹으면 그만이었다.
소 먹이는 아이들이래야 5~6명 정도이고, 그 마을 전체가 우리 집안들만이 사는 마을이어서 딱히 남의
감나무란 생각은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어릴적 향수가 있어서 어제는 사돈(준서할아버지)이 전라도에서 주문해서 택배로 보내신 것이 마침 도오감 이어서 아직은 떫은 감을 먹어 봤다.
어린 시절의 향수에 젖어서 말이다.
그 시골에서도 반이래야 두 반 뿐이었는데도 오전 오후반이 있어서(4학년까지만) 십리길이 조이 되는 길을 오전반 때는 아침 일찍 가지만 오후반 때면 별반 늦게 가는 것이 아니고 오전반 아이들이 가고 나면 길을 나선다.
가다가 산에 올라가서 참꽃을 따 먹기도, 그 시큼하고 떫기도한 풋망개도 따먹고, 점심밥을 조금 남겨서 오다가 산에 올라 산도라지를 캐서 반찬으로 먹어었다.
산토끼를 쫓기도 하고, 다리를 밑에서 올라가서, 남겨 온 점심밥에 고추장을 도시락(알미늄 네모도시락)에 넣어 흔들어 먹기도 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 먼지가 하얗게 앉은 다리에는 왜 올라갔던지?
차가 지나 갈 때의 진동이 무섭기도하고 재미있기도 해서인지 모르겠다.
오후반 때는 가다가 감꽃도 주워먹고, 논에서 논고둥을 잡아서 철로레일에 얹어 놓고 돌로 깨어 먹기도 했다
소 먹이러 강가 뚝에 소를 풀거나, 아니면 강을 건너서 산에 소는 올리고 물고기를 잡아서 준비한 고추장에 찍어서 먹기도 했다.
손가락만한 물고기를 손으로 비늘을 치고서는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왜 그리 깔깔대고 웃었는지
지금의 감성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장면들이다.
논고등이나, 민물고기를 날로 먹었으니 디스토마 걱정이 되는데 그 때는 물이 좋았는지 아직까지 디스토마를 걱정해야 하는 증상은 없다.
도오감은 삭혀서 먹는 것도 아니고, 서리가 오도록 두었다가 따서는 갈무리하면 감홍시가 된다.
마침 하나가 홍시가 되어 터져 있어서 준서를 먹였는데, 잘 먹었다.
변비 걱정이 되지만 다른 과일을 먹이고 잘 조절해서 먹일 생각이다.
그 감에는 준서 할아버지의 준서 사랑이 담겨있다.
키 작은 도오감 나무에 감이 주렁 주렁 열리면 초등학생 키에도 손에 닿았으니!!!!!
그 때의 주렁 주렁 열린 도오감이 발갛게 익었을 때은 얼마나 보기 좋던지,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를 보면 언제나 내가 자란 고향생각에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