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이란 도시, 미군 부대 앞이 학교여서 미군스리코터 차가 지나가면 기브미, 기브미 하고 따라가면,미군들은 껌, 쵸코렛을 던져 주었다.
그런 도시에서 살던 어린 여자 아이가 전깃불도 없고, 시계도 없는 시골로 전학을 갔다.
그 때는 신학기가 4월이였을 때였고, 전학 서류를 들고, 엄니와 넉넉한 십여리 시골길을 다리 아프다면서 칭얼거리고,
걸어서 학교로 갔고,
시골학교 운동장은 도시보다 넓었고,큰나무들도 있었고,
도시학교에서는 1950년대 후반이었으니 산 밑의 학교 운동장에 나무라고 없었고, 1학년 때는 천막교실에서 수업을 했었다.
눈에 보이는 시골풍경과 학교풍경 모두가 생경스러웠다. 운동장에 큰 나무는 아주 이쁜꽃을 피웠고, 겹벗꽃 이였다.
일제시대부터 있었던 국민학교였다.
그 도시 여자아이는 그 때가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교무실에서 전학서류를 접수하고, 교감선생님께서는 어느 선생님을 부르셨고, 그 선생님께서는 담임선생님이셨다.
어머니는 담임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가셨고, 어머니가 가시고 난 후, 담임선생님께서는 오늘은 오후반이니 이따 오후반 때
4학년 교실로 오라 하셨다.
반은 1반, 2반 두반 이었고, 4학년까지는 한 교실을 1반과 2반이 오전, 오후 수업을 하면서 같이 사용했고, 5,6학년은
1반, 2반의 교실이 각각있었다.
엄니와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 왔던 길이 얼마나 먼 길인지를 모르니 집에 갔다 오후반 때 올 것이라고, 집을 향해 타달타달 걸어서 갔다.
오후반이 시작 되었는데도 여자 아이가 들어 오지 않으니, 선생님께서는 반 아이들 몇사람을 운동장에 내어 보내어 찾아 보게
해도 집으로 돌아 간 아이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냥 오후반에 오라 하시지 않고, 나무 밑에서 놀다가 오후반에 들어 오라 하셨으면 그런 불상사가 없었을텐데.
그 반에 아버지 사촌동생이 있었고, 성씨도 같고 부락이름이 같으니 그 아이보고 너가 가서 찾아 보고 집에 와 있으면 너도 학교 다시 오지 않아도 되고, 없으면 오너라 하고 보자기에 뚤뚤 책을 말아서 어깨에 둘러 메고 그 아이는 놀면서 왔고, 도시여자아이는 십여리길 다리가 아프니 쉬었다 걸었다 집에 왔으니, 두 아이가 거의 비슷하게 집으로 들어 왔다.
나의 시골생활을 그렇게 요란하게 시작 되었다.
4월이었으니 학교 갔다 오거나 일요일 학교 가지 않는 날은 동네 여자아이들은 호미와 물에 넣어도 되는 대나무로 엮은
소쿠리를 들고 들고 나가서 풀을 캐어서 봇도랑에 소쿠리채로 일렁일렁 해서 흙을 씻어 왔다.
쇠죽을 끓일 때 봄 풀을 넣어서 끓여 주는 것이였다.
동네 아이들이라 해도 다 친척들인데 학교 갔다 와서, 4월 한달을 4~5명이 그렇게 풀을 캐러 다니면서 춥기는 해도 우리는 웃고 떠들고 재미난 놀이 같았다.
모내기가 끝나고, 5월 무렵 들에 풀이 자라니 학교 갔다 와서는 소를 데리고 들로 방천둑으로 나가서 풀을 뜯어 먹게 두고,
우리는 소를 따라다니면서 놀았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옆의 밭에 콩이 심어져 있어도 자라는 중이였고, 소에 끌려 가듯 동네를 벗어 났던 나는 늘 소가 무서웠다.
동물인란 것이 귀신처럼 저를 제압하는가? 무서워 하는가?를 아니 소가 언제나 나를 제압하는 것이였다.
모심기도 끝나고 풀이 자라 있고, 소를 몰고 풀을 뜯기러 동네 길을 벗어나 건천이 된 하천을 건너 가는데, 송아지도 에미소를
따라 왔다.
콩밭을 지날 때, 송아지가 콩밭으로 들어가서 소 이까리를 놓고, 송아지 후치러 밭에 들어 가니 에미소는 콩순을 뜯어 먹고,
어찌 어찌 송아지도 데리고 소도 데리고 콩밭이 있는 길을 벗어 났는데, 그날 저녁 때,친척이기는 햇어도 콩밭 주인이 집으로 찾아와 야단 야단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다시 그런일이 또 생겼고, 저번 그 콩밭이었고, 또 야단야단이었고, 소 하나 건사하지 못해서 그랬느냐?고
나는 된통 야단을 맞았다.
실제 콩이 자랐는데, 콩순을 소가 뜯어 먹었으니 콩농사에 지장이 있게 되는 일이였다.
그 후로 소이까리를 잡고 가는데 그 날도 소는 콩밭으로 들어 가려고 하고, 나는 소를 당겨내고 하는 중에,
동네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우리 소와 나만 남았다.
소는 동네 아이들이 간 길로 가지 않고, 소 이까리를 잡고 소에 끌려 가는 형국으로 소는 우리 밭을 지나서
우리 층계논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였다.
소가 늘 일을 하러 가던 곳이라 소는 나보다도 더 잘아는 길이였다.
여자아이는 혼자가 되었고, 소에 이길수는 없고, 동네 아이들은 다른 길로 가버렸고, 아무도 도와 주는 사람도 없었다.
울면서 그만 약이 바짝 올랐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소이까리를 바짝 잡아 당기니 소 머리가 비딱하게 들려지고 이까리 잡은 손 뒤의 이까리 길이는
길어지고, 남은 끈을 잡고 소를 때리고 또 때리고 자꾸 때렸다.
소의 코는 메달리고 아이가 약이 올라서 어른처럼 사정 봐 주면서 때리는 것도 아니고, 아주 혼이 났고, 이젠 여자아이가
기선을 잡게 되었다.
어른들이 논이나, 밭에 쟁기질을 할 때는 그저 이까리로 탁탁 치는 것처럼 하지 그 귀한 소를 때리는 일이 없기도 하다.
그러다 소가 상처가 나거나 죽기라도 하면 어쩌나? 란 걱정도 하지 못하고 실컨 때리고 나니 소 풀을 뜯기고 데리고 오는 길에는
이까리 잡은 손에 조금 힘만 주어도 소는 말을 잘 들었다.
그 시절 소는 시골에서는 사람 목숨 같은 그런 것이였다.
도시의 친척이 소를 사주면 키워서 송아지를 낳고, 큰소는 팔아서 소를 사준 사람에게 주고, 송아지를 키워서 일소로 하고,
그렇게 소는 큰돈을 만지고, 일도 하는 여자아이 보다는 훨씬 중요한 위치였다.
죽어도 좋다 하고 때렸지 싶은데, 약이 바짝 올라서 힘껏 때렸다 싶어도 집에 왔을 때 소가 왜 이렇노?란 말이 없으셨던 것을
보면,소 길만 들였지 국민학교 4학년 여자아이의 힘은 겨우 그정도 였던가 보았다.
작은 도시여자아이는 그렇게 시골 생활에 적응을 했어도, 그 때는 무공해 환경이라 낫으로 소풀을 할 것을 베고,
소가 풀을 뜯으러 풀밭으로 들어가면 이내 따라 들어 가야하니 뱀을 자주 만났다.
그 뱀은 아직도 제일 무섭다.
댕댕이 줄 걷어서 작은 소쿠리, 메뚜기 잡아 넣을 초롱 같은 것도 짜고 하면서,문득문득 뱀 걱정 없이 댕댕이줄 긴 것이 보이면, 풀밭을 뛰어 다녔으니 어쩌면 뱀에게도 모자란 적응을 했었던 것일까?
가을에 벼를 베고 물이 약간 있는 논에서 대강의 길이를 정하고, 양쪽을 논 흙으로 막아 물을 고무신으로 퍼내고,
논흙에 손을 깊이 넣어서,한번에 확 흙을 일으키면 벼처럼 누렇게 익은 미꾸라지 잡는 것도, 재미가 있었고,
벼를 베고 비가 와서 물이 발목까지 담아져 있는 논에서, 논고둥 잡는 일,아침이면 감 꽃 주어서 실에 꿰어 그 떨더름한
감꽃이 무슨 맛이 있다고,길게 목걸이처럼 만들어 목에 걸고 십여리길 학교 가면서 목걸이 감꽃 따 먹으면서 가는 즐거운 일이 더 많았다.
그렇게 중학교까지 시골생활에 적응을 하고 살았다.
고등학교 부터는 부산이란 도시로 나와 지금까지 도시에서 살고 있으니, 어린시절 시골 생활 적응 했던 그 시기가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나의 정서감은 그 때 그 시절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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