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방송에서 우리 일반인들이 생활속에서 하는 소리에 대해방송이 있었다.
상여가 나가고 영정사진을 든 사람이 앞서고 소리꾼이 소리를 하고 뒤 따르는 상여에는
고인과 함께 살아 왔던 연세 지긋한 친구들이 상여를 메고 상여 뒤에는 가족들이 따르고
또 친척과 지인이 따르고......
그런데 상여는 꽃상여가 아니고
단청 칠 비슷한것으로 칠한 것처럼 보였고,
즐비한 만장도 없었다.
그러나 호상인 듯 했고,
고향에 선산이 있다해도 부모님이 고향을 떠나 도시에 살다 돌아가시면
부모님 돌아가시고 고향 선산까지 성묘길 멀고, 친척이래야 살가워 할 친척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고 해
화장 장에 들려서, 납골당에 안치하고, 이 바쁜 세상은 형제라도 멀리 떨어져 살고 있고,
삼오제에 또 만나기 어려워 부모님 초상날 상복을 벗어 버리기도 하는 요즘으로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망인을 묘 속으로 모시고,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이 한삽의 흙을 덮어 드리고는
회가루를 포대기를 여러 포대기 뿌렸다.
보통은 2~3차례정도 하지만, 자식들이 많고 형편이 되면 10차례도 한다 했다.
그 때 부르는 가락을 회다지기 가락이라 하고
긴 나무작대기를 들고 들어가 방금 넣은 흙과 회를 다지는 것인데,
이제 마지막 가는 노래가락인데, 망자를 기쁘게 보내는 그런 가락이라 했다.
강원도쪽에는 비가 적어서 회를 넣어 다지면 세멘트처럼 봉분 밑쪽이 굳어지면
나무뿌리와 짐승들이 훼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고
남쪽은 비가 자주 오는 곳이라 봉분 다지기에 공을 들이는데,
그 노래가락은 이름부터 달랐다.
준서할미 맘에 닿은 것은
회다지기를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그런 이유가 있지만,
마지막인데, 기쁘게 보낼려는 맘으로 노래가락을 한다는 말이었다.
앞으로 장례문화는 자꾸 자꾸 바꾸어 질 것이다.
친척중에는 겉으로 들어난 것이 고관대직을 지낸 분은 아니였지만,
출신학교들이 고등학교, 대학교가 대단한 학교 출신이어서 빈소를 차려 놓고
참으로 많은 화환과 문상객으로 넘쳤다.
그 아드님 두분의 손님이.
마지막 가시는 날 밤 자꾸 옷을 버려서
닦아 드리고, 아랫도리 옷을 입히지 않으셨고, 그런 상태로 돌아가셨고,
이불호청에 둘둘 말아서 장례식장을 치룰 병원으로 옮겨 모셨고,
병원에 딸린 장례식장에서 모든 절차를 하는 줄 알고,
곽은 나무곽으로 할 것이냐? 돌곽으로 할 것이냐?라 묻는데 돌곽으로 할 것이라 대답을 했고,
그렇게 준비 해 주는 줄 알고
초상 전날 밀려드는 문상객을 받는다고 두 아들이 아무도 산소를 미리 못 갔었고,
막상 산소를 가니 산소와 병원은 아무런 상관이 없고,
돌곽을 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서
망인이 묻힐 곳만 파 놓은 상태였다.
우선 모시고 간 곽은 묻을 정도의 품질이 못되니
할 수 없이 몰장이라는 시신 그대로 땅에 묻는 것으로 끝을 내었다.
그 때가 20여년 전이니 지금보다는 훨씬 젊은 나이 일 때니 그 모습을 못 보아서
준서할미는 그 곁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서 서성이다 일행과 함께 왔다.
그 때는 한동안 그 생각이 문득문득 나고 돌아가신 어른의 생전의 모습도 생각나고......
그런데 세상이 변해서
몰장이라는 것은 옛부터 내려 온 장례의 모습이기도 했고,
땅에 묻힌 분이 차가 지나가고 사람들이 혹여 봉분을 밟을 장소라 해도
덜 외로우시지 싶고,
화장장으로 가고 가서도 미리 미리 장례식장과 연락해서 일찍 가지 않으면
관은 줄 세워 놓고 기다려야 하고....
이 세월은 삶도 애환이고,
죽음은 바로 죽음일 뿐이다.
그러니 죽음 뒤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몇일만에 당연이 치뤄내야 할 일일 뿐으로 흘러가는 세상이다.
강원도 횡성의 회다지기가
의미롭게, 아름답게 닥아온 아침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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