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퍼 먹는 주걱을 경상도 말로 주개라 부르기도 한다.
준서할미가 중학생 때 지금 울산시가 울산군일 때 지금은 공단 중심부로 들어가 집과 농토를 버리고 이주를 한 곳에
외갓집이 있었고, 우리 고향은 지금은 울산시에 편입되어 있지만, 울산군이 울산시와 울주군으로 갈라 졌을 때 울주군에 속한 관계로
그 때로서는 면인 우리고향 보다는 군청소재지에 있는 중학교로 갔고, 외갓집에서 다녔다.
그 때 외삼촌, 이모가 서울 연세대를 다니셨고, 방학에 내려 왔다가 갈 때는 동네에서 빚을 얻어 등록금을 가져 가고, 그 뒤 논을 팔아서
빚을 갚는 그런 형편이었다.
그 시절은 택배가 있는 것은 아니였고, 화물를 취급하는 회사에 가서 쌀을 화물로 부쳤는데, 그 쌀푸대기 속에는 흙을 깨끗이 씻은
무나 고구마를 몇개 넣기도 했다.
방학 때 오면 갈 때 쌀 대두 한말 반정도 포대기에 넣고, 무, 고구마 한 두어개를 넣고 일단 부산까지 가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것이라 하루종일 걸리다 싶은 기차여행에 배가 고플 것이라 요기거리로 보내던 것이 주개떡이었다.
일단 가마 솥에 찹쌀로 조금은 질쭉한 찹쌀밥으 지어서, 손잡이가 긴 주걱으로 힘껏 앞 뒤로 저으면 쌀알이 퍼지고 그렇게 하면
퍼진 쌀알도 있고, 온찹쌀알도 있어도, 찹쌀떡 같은 끈기가 생긴다.
그러면 팥을 삶아 대강 빻아서 그 고물에는 설탕도 없었고, 소금간만 한 팥고물에 찹쌀밥을 주개로 퍼지게 만든 것을 묻히면
그 떡을 주걱으로 만들었다고 주개떡이라 했는데,
소금간이 간간하고, 통팥알도 씹이는 그 주개떡은 명절날 하는 인절미보다 훨씬 더 맛이 있었다.
외할머니도 계시고 어린아이들도 있어, 겨울에는 차조밥을 해서 주개떡 방식으로 해 먹기도 했는데, 어쩌다 돌이 씹여서 그렇지
참말로 맛이 있었다.
목장주이신 블벗님댁에도 구제역이 인근까지 와서 간이 떨린다는 글을 읽고는 잠이 오지 않아서 불을 끄고 누었다,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일어나고, 컴에 앉으니 추워서 다시 눕고, 다시 일어나 앉고..... 블로그 마실을 갔더니 집에서 찹쌀밥을 해서
작은 양은호박에 찧어 인절미를 만드신 블방이 있었다.
아마도 그 때 그시절 주개떡 맛을 능가하지 못하겠지만, 파는 인절미 맛은 능가 할 것이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었지만, 참 아름다웠던 시절이다.
서울의 대학에 다니는 대학생이 쌀포대기에 고구마, 무를 넣고는 들기도 하고 머리에 이기도 하면서 버스를 타고 울산에서 부산까지
가서는 다시 기차로 서울역에 내려서는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갔으니,
한창 건장한 청년이셨던 외삼촌과 이모님이 그 쌀 한포대기로 몇일간이나 잡수셨을까? 라 새삼스레 생각이 난다.
해방이 되었을 때 일본에서 큰아들, 딸둘을 결혼시키고, 초등학생인 남매를 데리고 한국으로 나오셨고, 큰 아들은 일본에서 자랐으니
농사는 모르고, 면사무소 일을 보는 공무원이고, 작은 아들 키워서 농사를 맡기실 요량으로 농사일 하러 갈 때 늘 데리고 가셨던
외할아버님은 어느 날 장날 나무짐 소구르마에 싣고 팔러 갔던 나이로 치면 고등학생 무렵일 때 나뭇짐 가득 실은 소구르마 채로 읍내 장에
버리고 부산으로 도망아닌 도망을 갔던 그 작은 아들이 미워서 집에도 못 오게 하다 대학생이 되고는 등록금은 주었지만,
와서 갖고 가는 쌀은 눈 감으셨지만, 화물로 중간에 먹을 양식을 못 부치게 해서 외할머니 어쩌다 담넘어로 던져 화물로 부쳐 주시는
쌀로는 양식을 이어 갈 수 없었으니 대학공부 하는 동안 내내 배가 고프셨을 것이다.
그 시절은 아르바이트를 할 일자리는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젠 그분들도 일흔 여덟, 일흔 다섯이신데, 4.19혁명을 일츠켰전 4,19세대이시다.
주개떡과 함께 옛날 옛적의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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