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사람

사람 1

이쁜준서 2008. 10. 25. 03:22

살아가면서 무수하게 많은 사람을 만난다.

 

사람은 사람들과 사이에 살고 있다.

그러니 내가 불편하지 않아야 하고,상대방도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

어린 우리 준서(다섯살 여아) 도 올 해는 유치원에 다니고, 바쁜 에미랑 살고 있어, 종일반을 한다.

네살인 작년까지만 해도 제 몸에 누가 손을 대면 야단이 나고, 신이 나면 혼자도 옷을 입고, 양말도 신지만 그래도 누가 시중들어

줄 때가 많았는데도, 할미와 에미 말고는 같이 살고 있는 외할아버지도, 간혹 보는 아빠도 시중 들지 못하게 했다.

 

애기부용꽃

꺽꽃이 할 때는 10 Cm 정도였는데, 저렇게 왕성하게 자랐고

꽃을 피웠다.

그런데 그 꽃이 화분들 돌려 준 것도 아니고, 제자리에서 피었는데도,

꽃이 핀 각도가 다 다르다. 햇빛방향과도 무관하게 조화롭게 피어 더 이쁜 꽃이다.

 

 

유치원 종일반을 하면, 정규반이 끝난 오후 시간에는 5세, 6세, 7세반이 구분된 특별 수업시간 외엔 같이 섞여서 놀기에 작년보다

한살 더 먹었기도 하지만,남을 배려하는 것을 스스로 배웠는 모양이다.

유치원에서 생활은 모르겠지만, 집안 결혼식이나, 에미 직장분들을 만났을 때 제 볼을 살짝 만져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과 이야기 할 때는 눈을 맞추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인사도 잘 한다.

남을 배려한다는 것은 남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것일테다.

그래야 서로간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신지가 20년도 훨씬 더 지난 친정 이모님께선 생전에 자식을 낳지 못하셨다.

일본에 계실 때 원폭으로 사시던 집이 소실되고, 그 때 이모부님은 정신이 나가셨고, 그런 분을 모시고 해방되고 고국으로 나오셨지만,

그 후유증으로 이내 돌아가셨고, 6.25때는 울산의 고아원에서 일을 하셨다.

6.25 전쟁이 끝나고,고아원 생활을 접고, 부산에서 사셨다.

그 당시 고아원에서 중학교를 마치면 나가야 했던 관계로 부산에 살고 계실 때 고아원생들이 나이가 달랐지만, 5~6명이 거쳐 갔다.

 

그 중 한 사람은 이모님과 계속 살았고, 장가도 들이고, 그 몸에서 손주도 둘을 보아 돌아 가실 때까지 같이 사셨다.

 

 

 

1970년대 초여서 각 가정에 샤워시설이 있었던 시절도 아니었고, 특별한 집이 아니면 재래식 변소를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한옥 안방에서 아기들 목욕을 시켰지만, 따뜻함 물이 있는 대중탕에 아기들도 데리고 다녔다.

대중목욕탕에 손주들을 데리고 가시면 아기를 타올로 사서는 어른들도 탕의 물이 뜨거워 못 들어가는 온도라도 아기를 안고

들어 가셨기에, 목욕탕에 사람들이 수근거리기도 했다 한다.

 

이모님 생각은 그렇게 따근따근한 물에 목욕을 해야 감기가 들지 않는다 생각하셨던 것이다. 

처음 얼마간은 돐도 않된 아기였는데, 입이 파랗게 되고 넘어 갈듯이 울었지만, 그 후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세살까지 -부산에서 경주쪽 외가로 가는 차 속에서 경기를 한번 한 후로는 더 자주 경기를 하게 되었다.

그 후로 유치원을 다니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하면서 경기가 아니고, 간질이라는 판정이 나고, 그 아이의 엄마는 어머님이

너무 뜨거운 욕탕에 데리고 들어가셔서 그렇게 되었다고 늘 말을 했다.

 

외국에서 저개발 국가인 우리나라에 상주하면서 아동들을 치료하는 병원이 있었다

약값은 얼마 되지 않았고, 한 3년간 약을 먹었는데, 간질을 고치게 되었다.

  

 

 

 

 

 

6.25 동란 후 어수선할 때,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 원장도 하셨고,

그 때의 초창기 교회들이 지금은 아주 큰 교회들이 되어 있지만,

초창기 교회의 일군이시기도 했다.

그러나 자식를 낳아 기르면서 속을 삭인 적도 없고,

남편에게 서로간 맞추면서 오랜 세월을 사신것도 아니어서,

남을 배려할 줄을 모르셨다.

 

 

  

 

 

 

외할머니께선 그 큰딸을 늘 생속이라 , 생속이라 ....

라 하셨고.

그래 그러셨는지, 개도, 고양이도, 새도 특별하게

다루시는 능력이있었다.

장난으로라도 그 이모님을 밀치면 그 집 개가 눈에

불을 켜고 방으로 들어 왔다.

새장의 새도 방문을 닫고 내어 놓으시면 이모님과

놀기도 했고.

 

사람과 사람은 일방적인 사랑만으로는 부담이 되는데, 동물과의 사랑은 사람이 주인이니 지극한 사랑은

통하는 모양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통치 한 시대를 그것도 일본에서

사셨고, 원폭을 목격하셨고,

그 휴유증으로 남편을 잃어셨고,

원폭후의 일본의 흉흉한 인심도 겪으셨고,

6.25동란의 시대를 살으셨고,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재혼도 않으셨다.

그 때만 해도 재혼을 않고 수절하는 것이

부덕이었으니까.

 

 

 

 

 

                                                                                                                                         바위에서도 나무가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