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사람

일제 시대를 사신 외할아버지....(정직)

이쁜준서 2009. 1. 10. 08:17

 

 

2007년 7월 준서와 준서외할아버지가 만든  것들

 

 

준서할미가 초등학교 때가 1950년대 였으니 우리나라 물자가 아주 귀했던 시절이었다.

한번은 엄마는 교회를 가시고, 어쩌다 그랬는지는 기억에 없는데, 아주 큰 접시를 깬적이 있다.

그 때 그 시절에는 큰 접씨는  없는 집도 있었고, 큰 접시를 다시 사기엔 언제가 될런지도 모르는 그런 시절이었다.(1950년대는)

한 집에 사는(부산이어서 서너집이 살았다) 아주머니가 질색을 했다. 너  엄마오면 큰일 날것이라고 걱정을 해 주셨다.

초등 1학년 때 였는데, 괜찮다고 우리엄마는 거짖말을 하지 않으면 때리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이야기를 했다.

엄마가 돌아 오시니 그 아줌마가 큰 접시를 깨고도 거짖말을 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걱정도 않한다고 이야기를 했고,

나는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로 꾸지람도 듣지 않고 넘어 간 일이 있다.

초등 2학년 때 점수가 제대로 않나온 시험지를 숨켰다, 많이 맞었다. 거짖말을 했다는 명목이었다.

 

우리 외할아버지가 일제시대였는데,어린 자식 4남매를 데리고 솔가를 하셔서, 만주에 가셔서 살다 다시 한국으로 나오셨다.

다시 일본으로 솔가를 해 가셔서는 위로 삼남매를 결혼시키시고 살다 해방과 함께 한국으로 나오신 분이시다.

만주에서 한국으로 와 잠시 살 동안 우리 엄마가 쪽파가 채 한뼘도 되지 않은 예쁜 모습에 남의 집 것을 양념간장에 넣으려고

몇포기 뽑아 왔다 한다. ( 10살 전후의 아이였는데, 놀다가 집으로 오는 길의 채전밭에서)

 

외할아버지 께서, 남의 것이라고 가져다 주인에게 미안하다 하고 밭에 다시 심어 놓고 오라고 하셨다 한다.

다시는 그런 일 하지 않고, 밭에 다시 심어 놓고 오겠다는 말씀을 드려도 기여히 그 집에 가 사과를 하게 하셨다 했다.

만주에 살다 와서 그렇지 한국에 계속 살았다면 집성촌이었고, 밭에 심어진 쪽파 몇뿌리는 그냥 뽑아 먹을 수 있는 시절이었는데,

우리 외할아버지 교육은 정직에 관해서는 그렇게 엄격하셨다.

-정직한 머리에는 神 이 보살피게 된다는 말을  일본어로 늘 말씀하셨다 했다.

엄마의 형제 5남매중 큰이모님은 자식이 없으셨고, 준서할미에게 외사촌이 되고, 이종사촌이 되는 아랫대도 반듯하게 살고 있고,

우리들의 아랫대인  우리 자식대가 27명인데 다 성실하고, 반듯하게 살고들 있다.

 

정직은 학교교육에서도 누누하게 가르치지만, 부모가 자신도 실천하면서 자식에게 가르쳐야 몸에 배는 것이다.

정직해서 불이익도 당해 보아야 정직함이 더 몸에 배일 것이라 생각한다.

외할아버지를 기억하면, 늘 사랑방에서 혼자 밥상을 받으시고, 담뱃대를 물고 계시는 모습이 기억되고 들일을 하시는 모습은 기억에 없다.

일제시대에 아무 근거도 없는 일본으로 식구들을 솔가해 가셔서 조센징이라는 비하의 대접을 받았는 일본에서 막내 딸 하나를 더  낳고,

일본 동경에서 자기 땅에 소각장을 운영 하셨다고 들었다.

정직하게 살겠다는 일념으로 정직해서 더 힘든 경우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사셨던 분이셨다.

 

우리들의 정점에 계시는 외할아버지를 기려보는 아침이다.

거짖말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잘못해도 매는 맞지 않을거라는 확신으로 나를 키워주신 친정엄니께도 감사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