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그 옛날......

이쁜준서 2008. 4. 8. 14:04

떨어진 고무신도 기워 신던 시절이 있었다.

고무신 바닥의 요철은 그리 깊숙한 것도 아니고, 또 자주 씻어야하기에 없는 살림 형편인 그 시절에는

고무신이 어찌 그리도 잘 떨어지던지, 도시에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시골에서는 떨어진 고무신에

헝겁을 대고 기워서 들 일 때는 신고 가기도 했다.

 

시골에서는 알미늄 냄비도 구멍이 나면  " 솥이나 냄비 떼우소~오~" 라면서 정기적으로 봇짐을

등에 지고 동네 어귀에 앉아 정말 못쓰는 냄비를 오려서 구멍에 대고 납땜인가? 로 떼워서 그 냄비를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정종 댓병도 가지고 가면 엿을 주는데, 그것도 그리 흔한 것이 아니어서 차사나, 기제사 때 집에서

술을 담게되고, 맑은 술은 따로 떠 그 병에 담았으니 그것도 엿을 바꾸면 안되는 물건이었다.

엿은 먹고 싶고, 엿장사는 가지고 온 고물로 엿을 바꾸어 주면서 침을 흘리고 구경하는 아이들에게

쬐금 아주 쬐금 가위질을 툭툭해서 주면 집에 어른만 없으면 야단은 고사하고, 낡았다 싶으면

고무신, 냄비등을 가지고 가 엿을 바꾸어 먹고, 나중 어른들께 야단도 호되게 맞고 그랬다.

 

70년대는 도시에 고물상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엔 골목마다 만물상인 구멍가게가 생기고, 아이들도 구멍가게에서 과자를 사 먹게 되었다.

고물을 거두는 사람도 아저씨도 있었지만, 머리에 수건을 쓴 아주머니들이 거둔 고물을 리어카에

싣고, 엿대신 옥수수 뻥튀기한 것을 떠 주었다.

고물의 질이 좋거나, 양이 많으면 돈으로도 계산 해 주었다.

더 이상 냄비를 떼워서 쓰는 시절이 아니어서 오래 된 냄비류들도 나오고, 고무신도, 헌책도,

때때로 신식 스텐으로 된 제기를 바꾸면서 나오는 놋그릇도 거둘 수 있었다.

아마도 그런 날은 횅재한것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 때의 놋그릇은 요즘 식당에서 나오는 놋그릇들처럼 재 활용으로 다시 합금한 그런 놋그릇이

아닌 좋은 것이였는데, 요즘같으면 무슨무슨 공방이란데를 가서 아주 거금을 주고 사야할

그런 좋은 놋기류였다.

 

이지음엔 엔간하면 박스,신문, 책등을 고물상으로 직접 가지고 가지도 않고,  그것들을 집으로

찾아와 돈을 주고 바꾸어 가는 사람도 없고, 거의가 대문 밖에 내어 놓으면 누군가가 가지고 간다.

주로 연세드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심천 향나무님의 글에 고물을 수거해 가는 /돈을 주고 바꾸어 가는 / 그런 글이 있어

옛날 이야기를 올려 본다.

중국은 하 넓어서, 시골에서 도시로 나와 고물이라도 거두어 돈을 벌어서 고향에 보내어 부모님 봉양하고, 아이들 교육도 시킨다고 했다.

우리들도 60년대 도시로 도시로 나와 공장에도 들어가거나, 장사등을 해 그 돈을 고향으로 보낸

세대가 우리세대이다.

나의 고종들은 그리해서 고향에 부모님들 논도 밭도 사드리고 결혼을 했었다.

이번 고향길에 만난 그 고종들, 사촌들 자녀들은 다 대학을 나왔고, 손자, 손녀들을 본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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