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되는 어린날은 다섯살 때이지 싶다.
다 기억이 나는 것이 아니고, 띄엄띄엄 기억이 난다.
처녀적만 해도 해운대는 바닷가라 높은 집을 지을수 없다고 했는데, 이즈음엔 높은 아파트가
얼마나 많던지, 해변의 뒷쪽 길 아파트가 많은 길은 숨쉬기도 힘이 들었다.
좌동,우동 일대가 지금의 아파트 숲이지 싶다.
옛날 상식으로 생각하면 모래 위헤 지은 집인데, 해변이 보이는 앞쪽의 고급아파트들도 높기는
마찬가지이고, 건축기술이 뛰어나게 발전하다보니 그리 높으게 거실에서 바다가 바로 코 앞에
보이듯 하게 지었을 것이다.
내가 기억되는 것은 마르보시 사택이다.
마르보시란 회사는 일제시대에 화물을 취급했던 회사라고, 어릴적 그렇게 들었는데, 이름은 사택이나
판자로 울이 되어 있고, 툇마루가 달린 큰방, 그 옆방은 부엌안에 큰방보다 작은방, 두개의 방은
미닫이 문으로 통했었다.
그리고 변소는 동네 입구에 공중변소가 있었고, 그 변소문은 꼭 닫기지도 않았고, 밤에 변소에나
갈려면 촛불을 들고 어른들 핀찬을 들으가며 같이 갔어야 했다.
그런데 그 동네가 제법 컸다.
마당을 조금만 파면 모래가 나오고 물이 약간 고이길래 초등학생일 때 샘을 팠다.
땅 밑으로 2미터 미만으로 팠는데도 물이 나왔다.
물은 소금기가 있는 그런 맛이었고, 주로 청소용으로 사용했다.
이글을 쓰면서 혹여 마르보시, 1950년대 부산, 판잣집 등등으로 검색을 해보았는데, 영도다리가
끄덕 들었을 때의 모습, 초량 산위의 판잣집등 몇몇개가 나와 있었고, 거의 판잣집을 검색한
것엔 -이별의 부산정거장- 이란 유행가 가사가 나와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의 못 살았던, 일제의 잔재가 여기 저기 있던 것들은 기록도 없이 사라진
모양이다.
수도물은 공중 수도가 있어 물동이를 나란이 줄을 세워 놓고 물을 길러다 먹었다.
그 때는 각자 집에 수도물이 없었다.
1950년대의 모습이었다.
어떤님의 블방에서 벌집이란 단어를 보니 예전 공중변소로 온 동네가 사용했던 그 생각이 났다.
요사이는 벌집에 사는 사람들이 거의가 생활보호자가 많겠지만, 그 때는 마로보시사택에 사는것이
그래도 아주 산위 판자집에 신문으로 벽을 바르고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살림살이였다.
부산의 1950년대의 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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