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지금은 지나간 것은 다 아름다워

이쁜준서 2020. 3. 22. 02:52

맘 맞는 두 친구가 있어 몇년간 떡을 하기에 마치맞게 쑥이 자랐을 때, 버스를 타거나 전철을 타고 내려서 한참을 걷거나  너무 많이 걷거나 오르막이 있는 곳일 때는 친구 남편이 승용차로 데려다 주고 또 데릴러 왔다.

서로 약속한 것이 없어도 김밥, 떡, 빵, 커피, 과일 중복 되는 것이 없이 준비해 오고, 정작 쑥을 쌀자루에 담아 올 정도로 많이 뜯지만 중간 중간 간식, 커피, 점심을 먹으면서 앉아서 이야기 하고 노는 소풍날이였다.쑥이 차곡차곡 담기면 색이 변하기도 하기에 넓은 쌀자루에 담아서 차를 탈 곳으로 이고 나오면, 우리들 모양새에 우리들은 까르르 웃기도 하고 마주치는 사람들은 어디서 뜯었나? 참 많이 뜯었다 하기도 했다.

쑥은 뜯어 오면 훌훌 공기 통하게 널어 놓고는 다듬고, 데쳐서 손질하면서 떡할 쌀을 담그었다. 방앗간에 가져가서  쑥을 넣은 인절미를 해서 콩고물 무치지 않고, 랩에 한번 먹을 정도로 말고, 맵쌀에 쑥을 넣고 갈아서 반죽을 치대어, 덩이를 만들고, 쑥시루떡을 하고 그렇게 준비해 두면 비오는 날도, 걷기 운동을 길게 잡고 나가는 날은 인절미 두 덩이 넣고, 커피 물 넣고, 믹스커피 가지고 가고, 어느 인심 넉넉한 사람이 공으로 준 듯이 먹었다.  실제는 떡 하는 날은 이웃집에도 나누어 먹었다. 쑥을 씻고 데치고 양이 많으니 참 일거리도 많았다.

그러다 그 떡들을 해 주던 방앗간이 멀리 이사를 가고, 쑥시루떡은 한 날은 카스테라처럼 폭신폭신하고 쑥향이 나는 아주 맛나는 떡은 일거리가 많아서 해 줄 떡 방앗간이 없어서 그 낭만이 없어져 버렸다. 몇년이 지나고 나니 우리들도 맘이 늙어버려서 들판으로 새삼 쑥을 뜯으러 나기지지도 않게 되었다. 일년에 서너번을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는 것으로 만날 뿐이다.

우리동네가 우리들이 이사를 올 때는 경작지를 밀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단독주택이 들어 선 게획된 도시였기에  서로가 낯선 사람들이 모였기에 친구가 된 사이였다.

노년을 살아가기에 그 모든 지나간 일들이 아름답다.

우리 부모님대 어르신들께서는 그분들 일생에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신분들이시다. 현실이 각박한 젊은 우리들을 보시면 다 옛말하고 살 때가 있다. 참고 살아라고 격려를 해 주셨다.

그러나 코로나 19로 당하고 있는 이 격랑을 시어머님께서는 이게 바로 전쟁이라 하신다. 6,25전쟁 때 만삭의 몸으로 피난길에 남편은 군대에 가고 없고, 마을사람들과 시어머니와 시동생과 함께 갔는데,  가다보니 혼자가 되었고, 국군을 만났는데, 그냥 가라고 하더니, 집으로 돌아 올 때는 인민군을 만났는데, 그 때도 혼자여서  또 가라고 손짓을 하더라 하셨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이 코로나 19는 너무도 많은 억울하게 생명들이 갔기에  옛말 하고 살 때가 있는 것이 아니고 너무 너무 아퍼서 지난 이야기도 올리지도 못할 것이다.

사촌언니가 살고 있는 도시도 이젠 환자가 나오고,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도 환자가 나왔다 한다고, 하면서도 답답해서 산책을 나가야 하고, 실개천이 흐르고 오리가 놀고, 실개천가의 공원에는 꽃이 피고, 멀리서나마 사람들도 보이고 해서 나간다 했다.

어느 할머니 한분이 일주일에 한번 색스폰을 연주하는데, 그 때는  사람들이 떨어져 앉아서 듣는다 했다.나는 마스크도 사러가지 말라면서 아이들이 보내 온 것도 있고, 통장이 가져다 준것도 있어서 사러 가지 않는데, 이웃친구는 외국에 나가 있던 손자3명의 것과 자기것을 모았다 인편에 보낸다면서 사러 나간다.

어제는 카톡으로 마당에 채소 사다 놓았다 해서 내려 갔더니 무, 대파, 애동호박이 들어 있었다. 마스크만 사고 돌아서지 제대로 찬거리 사지 않는다 하더니 두집 몫을 사 오느라 핸드카트도 가지고 가지 않았을것인데 무거웠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