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 조지아블루
이 꽃보다 반 정도의 작은 블루색의 꽃이 피었는데,
화분 속에서 새촉이 아나 올라 오더니 꽃이 핀 것은
꽃색도 변했고, 꽃의 크기도 커졌습니다.
흉 허물 없이 때로는 이제야 자식들이 결혼을 하고 즈그들도 에미가 되고, 에비가 되었지만,
그 자식들이 청소년일 때는 즈그 엄마는 흉 아닌 흉을 하면 듣는 친구들은 요새 아들 다 그렇다 우리 누구도(이름을 부르면서)
하면서 또 흉아닌 흉을 하기도 하는 그런 친구들과 만났습니다.
그 중 한 친구 아들이 여행사를 하는데, 그 여행사에 계약을 하고 중국 여행길에 나선 적이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 어머니가 처음으로 외국 여행이시고, 엄마가 올 해 환갑이기도 해서 직원을 가이드로 보내지 않고, 저가 가이드로
나섰습니다 하고는 이 여행에서는 저가 이익을 생각지 않고, 저 어린시절 한 동네네 살았던 어르신들인데 저는 모시는 일이 좋다면서
3박4일 일정의 여행에서 아들의 안내로 가족 여행 온 듯이 제대로의 최상급의 대접을 받았던 여행이었습니다.
관광지를 걷다가 준서할미와 도란 도란 옆에서 이야기 하면서 걷는데,
준서에미와 동갑인 아이이고, 저도 3살 5살 아기가 둘있는 가장이었는데, 준서이모 이름을 칭하면서 잘 지내지요?라 했습니다.
너그하고 나이 차이가 져서 너희가 이사를 갈 때 5살인가? 그랬는데 이름을 기억하니? 했더니,
엄마 만나면 아지매들 안부도 묻고, 누나들, 친구들, 동생들 안부도 다 묻습니다라고,
오빠하고 한번 졸졸 따라 다니지도 않은 준서이모를 동생이라 하면서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손주들을 보아 주고 있어서 2박3일 일정도 않되고, 1박2일 일정으로 갈 만곳은 서울이 제일 적격이라
몇년 전에 서울을 다녀 온 적이 있었습니다.
준서에미가 숙소를 다른 곳에 잡지 말고, 우리 집으로 오시라고 저가 바뻐서 직접 식사를 집에서 대접하지는 못해도
저녁 식사는, 식당으로 모시고 우리집으로 오시면 된다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는 곳은 총각인 다른 친구네 아들집으로 가서 잤습니다.
서울가면 지하철도 탈 줄 모른는 사람들이 어디를 간다고 나서냐면서,
친구 남편께서 우리가 갈 곳 안내서등을 컴퓨터로 알아 유인물도 만들어 주시고, 우리를 인솔 해서 가셨는데,
그 친구의 아들이,우리집으로 오라 한다면서 그분께서 편안하기는 그 분의 아들집이 낫겠다 싶어서 그곳으로 갔었습니다.
저녁식사를 대접한다고 일찍 퇴근해서 어둡기 전에 도착했는데 우리는 그 때 하마 식사를 다 했고, 그 식당으로 바로 왔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 퇴직하신 분이라 - 우리는 선생님 인솔하에 수학여행을 왔다면서 참 즐거웠던 여행이었습니다.
그 친구들 중에,
한 사람이 봄에 허리 수술을 했는데, 수술한 것으로 목표한 것은 고쳤는데, 월요일 입원해서 신경외과 수술을
또 받게 되었다 해서 다른 볼일도 있고 친구들이 만났습니다.
장사 하는 것이 하루라도 문을 닫을 수 없는 장사여서 시골 친정에 아이들 데리고 가서 자고 오는 일도 못했었는데,
막내 아들이 어린아이 때 외사촌 형들과 놀겠다 해서, 3번인가 외갓집에서 엄마 아빠 없이 잔 적이 있었다 합니다.
몇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 가시고 연락 받고 서울에서 저녁 때 온 아들이 외할머니께 인사드리고는 젊은 남자가 대성통곡을 하더랍니다.
40대에 일찍 아들이 저 세상 먼저 가고, 40대 젊은 며느리가 3남매를 데리고 함께 사는데, 그 손주들을 할머니가 기둥이 되어
키워 왔었는데,
손님으로 온 친척들이 할머니 손으로 자란 손주들도 그렇게 울지 않는데, 외손자가 왜 저렇게 대성통곡을 하느냐고
친척들이다 보니 따라서 눈물 짓는 사람도 있었다 합니다.
나중 집에 와서 니가 왜 대성통곡을 했느냐? 하니,
외갓집에서 밤중에 배가 아픈적이 있는데, 외할머니가 그 밥중에 밖에 나가셔서 풀을 뜯어 와서 생즙을 내어 주셨는데,
내가 먹고 나았다고, 내가 몇번을 외갓집에서 자고 왔지만, 외할머니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 하시는구나라 알아 졌다고 말하더라 했습니다.
친구 모친께서는 시골이라 농사도 있고, 며느리는 집에 과수원이고 농사일은 놔 두고 시골에 있는 음료수 공장으로 일을 하러 나가니
딸래 집에 오셔서 진득하게 주무시고 다문 하루라도 외손주 딸과 지내지 못하신 어른이십니다.
그 친구들 중.
며느리가 둘째를 낳아서 휴직 상태라 첫 손주를 출퇴근하면 보아 주다 자유의 몸이 된 친구는
수도권에 사는 외손녀도 가서 아기 때 보아 주었었는데, 지금 3학년이지 싶습니다.
자유의 몸이라 딸네 집에 다니러 갔더니, 외손녀딸이 할머니 할머니 100살까지 살아라 하더랍니다.
100살을 살면 내가 똥도 싸고 오줌도 쌀것인데 하니 그러면 내가 기저귀 채워 주고 옷도 입혀 주고 할꺼니 100살까지 살아라 하던데
그 이튿날 집으로 돌아와서 아들네 집에 갔더니 5살 손주가 할머니 오래 오래 살아라 하더랍니다.
누나는 똥도, 오줌도 싸도 기저귀 채워주고 다 치워 준다고 하던데 니가 그렇게 하겠나? 했더니 그 말에 대답은 못하고 한 참을 생각 하더니
내 죽을 때까지 같이 살자 하더라 했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할머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할머니가 나를 제일 사랑하지 않으면 배신이다라 하기도 했다 합니다.
그 다섯살 동생이 14개월차인데, 즈그에미가 휴직을 하고 키우니 할머니와는 직접 업고 안고 하지는 않았는데도,
할머니가 가면, 어깨에 고개를 묻고 팔로 할머니를 안고, 잠시 그렇게 있다 합니다.
8월부터 에미가 다시 직장을 나가니 그 14개월차 아기를 보러 가기는 한다 하지만요.
딸도 엄마 나하고 살자.
며느리도 우리하고 살자고 하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어서 그렇지 부담이 되면 몇달도 되지 않아서 요양소로 보낼 것이면서
입으로는 그래 그래 하지만 그냥 속아 주고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
특이 자식들이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니고, 이 사회 구조가 그렇습니다.
단지 준서할미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외갓집에 가서 3번을 어릴 때 자고 온 적이 있는 - 저도 5살 2살 아이들 아빠인
젊은 사람이 외할머니가 돌아 가신 빈소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울 정도이면 맘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이고,
우리 할머니들의 자리는 아기 손주들에게 할머니의 정이 따뜻해서 나중 나중 즈그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그 따뜻한 정
기억하는 따뜻한 사람이 되게 해 주자는 것이지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예로 들다보니 주제가 흐트려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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