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젊어 한 때란 말을 다 이해 되지 않았지만,

이쁜준서 2016. 6. 3. 23:51







[젊어 한 때다 ] 란 말씀은 우리 할머니 세대분들께서 우리 엄니 세대분에게들 하셨던 말씀이셨고,

또 우리 엄니 세대분들께서 준서할미 세대 새댁이던 30대 - 16살 소녀도 아니면서 깔깔, 까르르 웃던 그 시절에 하셨던 말씀이지요.


젊어 한 때는 

입맛이 당겨서 음식이 더 맛나기도 했고,

집안 일을 해도 재미가 있어서 힘든 줄도 지루한 줄도 모르고 했었고,

준서할미 젊어 한 때를 쭈~욱 늘여서 두 딸들 여름 원피스 뒤로 리본 묶어서  두가닥으로 묶어 주던지 두 가닥으로 땋아서

아침 대문 나가 골목길 돌아서 나갈 때까지 뒷 모습 보면서 그 하루 입고 나면 다시 손빨래 해서 또 다름질 해서 입히고는

뒤로 리본 묶어 주면서 그 면천이 손에 뽀송뽀송하게 닿은 촉감..... 아이들 머리 손질 해 줄 때의 그 감촉들....

젊어 한 때의 즐거움이였습니다.





젊어 한 때는 샘물 같았습니다.

고단해도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거뜬 했고,

별로 굵지도 않은 손목으로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기도 잘 했고,

내게 필요 한 일도,

친척이나 친구들에게도 필요한 일도 잘 했었지요.






1970년 후반까지도 결혼식을 하면 결혼식은 예식장에서 하고, 집에서 손님을 받았습니다.

집에 손님 접대할 음식을 해 놓고, 대소가의 안 사람들이 손님 접대를 했었지요.

1980년 초반까지는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고, 예식장 근처에 즐비하게 예식장 손님을 받는  식당이 있고, 식당에서는

밥과 음료수, 술만 사 먹고, 집에서 잔치 음식을 해서 갖고 가서 손님을 치루었기에, 갖고 간 음식을 담아 내는

예전 전통 혼례나 상사일에 마당 한 켠에 천막을 치고 가방을 본 것처럼 여자 혼주의 친구들이 그 일을 담당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대소가의 잔치 때에 준서할미는 언제나 음식을 식당으로 싣고 가는 것을 책임지고, 가서도 혼주의 친구들이

도와도 그 중심에는 준서할미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1980년 후반 언제인지?는 기억에 없지만, 슬그머니 식당에서 잔치 음식까지 식사까지 다 차려 주고

1인당 얼마란 가격으로 계약을 했었지요.

지금은 아마도 1인당 30,000원 이상을 받지 싶습니다.


젊어 한 때는 일을 하면 재미가 나고, 재미가 나다 보니  더 궁리도 떠 오르고 그랬습니다.

그 흔한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이 우스개 말이 아니였구나를 실감하고 살아 갑니다.

까르르 까르르 웃음보 터지면 우리 아이들이 엄마 또 뭇음보 터졌다라고 준서할미를 보던 세 식구의 따뜻한 눈도 흘러 갔고,

아기 준서를 데리고 있을 때는 소리 내어 깔깔 하는 웃음은 아니어도  늘 웃는 시간이 많았는데,

좋은 일 있으면 미소 짓는 것이 다 이게 살아 집니다.

옥상에서 꽃들을 볼 때는 늘 미소 짓지만, 실상은 마음이 더 행복한 웃음을 웃고 있습니다.


어제는 정리정돈을 하면서 버릴려고 내어 놓은 양은 그릇 중에서  또 한개를 챙겨 넣었습니다.

원래의 제 기능을 다른 기능으로 하면 썩 좋은 쓸모가 될 것 같아서 입니다.





원래 나는 아내란 자리 였고, 며느리란 자리였고, 우리 아이들 엄마란 자리였고, 준서의 할머니란 자리였는데,

이제는 할 수 있는 일 해 주면 좋고, 해 주지 않아도 건강하게 만 살아 주면 더 더욱 좋은 자리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필요하겠다 싶은 것을 해 주지만, 그것은 준서할미의 배려이지 책임은 없습니다.


젊어 한 때의 세월의 기차는  준서할미를, 어디로 무엇을 하던간에 이제는 책임을 지우지 않는 곳으로 데려다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