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살아 가는 모습들

이쁜준서 2015. 12. 1. 06:57

 

 

 

 

네살, 한살 아기를 둔 아빠는

( 가장이라 부르니자니 너무 그 책임이 무거운 듯 해서요)

먼 나라에서 혼자 직장 생활을 했었습니다.

기후 조건이 너무 열악해서 회사에서 집도, 자동차도, 핸펀도 제공하지만, 아내가 몇번 가서 있다 왔지만,

아기들을 키우면서 살기에는 너무 기후가 맞지 않아서 아내는 한국에서 살고

( 역시나 고국이라는 말보다 한국이란 국명을 들으면, 무궁화꽃 하면 우리나라 꽃 같고 한국이라 하면 우리나라로 생각 되기에요)

아기 아빠만 그곳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접고 나왔습니다.

일단은 아기들과 너무 있어 주지 못했다고 직장을 그만 두고, 3달을 놀면서, 도시의 살림집에서도 지내고,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가서 고향집을 지키시는 노모를 모시고,

여기 저기 관광을 다니다가는 다시 고향집에 머물면서 네살 아기가 좋아 하는 낚시도 다니고, 작은 도랑에서 민물고기도 잡고,

메뚜기, 물곤충, 벌레, 나비, 잠자리들을 잡아서 손에 쥐어 보기도 하고 그렇게 놀다 도시의 집으로 왔을 때는,

그렇게 메뚜기, 매미, 개구리등을 무서워 하던 네살 아기는 다 손으로 만지고 놀 수 있게 되어 왔다 합니다.

 

그렇게 아기가 아빠랑 친해지면서 기가 살고

(언제나 기세 등등했었지만, 정말로 몸 놀림이 빨라지고, 눈은 반짝이고,)

한살 아기는 낯가림이 심했는데, 낯 선 사람에게도, 낯을 가리지 않게 되었고

( 월령이 더 해지면서 발달 단계로 그리 되었지 싶기도 하구요)

그 가족의 3달간 일상은 모두가 행복했습니다.

 

먼 외국에 아기아빠의 친 형님이 가서 자리 잡고 사는데, 일단은 놀러 오라고, 와서 보고 같이 나 하는 일 하면서 살자고 해서

어제 가족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중간에 싱카폴에서는 12시간 기다려서 다른 비행기를 타고 간다하니 1살 아기에게는  부담이 되는  여행입니다.

그렇게 먼 외국에서 아기들 키우면서 살아 볼까? 하고 간 것입니다.

 

 

 

 

 

 

컴퓨터 쪽 공부를 한 젊은이는 부전공으로 전기쪽 공부를 했었고, 전기1급기사 자격증도 땄습니다.

그 어렵다는 전기기사 1급 시험을 식구들이 다 나간 집에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서 공부 해서 땄습니다.

하이칼라쪽 직장을 구하는 것도 아닌데, 군필까지 했는데도, 직장을 구한다고 1년여를  취업공부를 하면서 원서도 내어 보고 했으나,

조금 이름난 직장에는 지방대 생이라고, 밀리고, 

작은 회사에서 1~2명 채용하는 것에서는 고졸자에게 밀리고,

전기기사 자격증이 있다 해도 내가 현장 경험이 전혀 없으니 경험을 쌓는다면서 용역회사에서 관리를 맡아서 하는 곳에서

전기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성실한 젊은이에게 햇빛이 쨍 비춰지기를 간절한 맘으로 바라게 됩니다.

 

 

 

 

 

이웃에는 5일장을 가는 장사꾼이 있습니다.

자식들도 있지만, 현재는 혼자 사는 사람이고, 혼자 사는 것은 30대부터였다 합니다.

팔고 남는 채소들은 경노당에 찾아가서 나누드리기도 하고, 교회에 가니 교회에 어느 한 사람에게 내 차에 가면 채소가 있으니

필요한 사람 가지고 가라고 한다 합니다.

그 사람은 먹고 사는데 관계 된 일인가? 그렇지 않은 일인가?로 판단을 한다고 합니다.

 

한 겨울 아주 추운 날 오일장을 갔다 오면 준서할미가 밤 10시경 전화를 합니다.

오늘은 많이 팔았나? 추웠재?

그러다보니 어느 해 봄에는 꽃을 사다 심기 시작 했습니다.

겨울에 어디에 둘려고? 했더니  답이 명쾌 했습니다.

올 해는 첫해라 화분도 사고, 화초도 사고, 흙도 샀지만, 그냥 밖에서 얼어서 죽어도 내년에는 2,000원~3,000원을 주면

화초를 살 수 있는데 뭔 걱정이냐?고 하면서 내가 희야 때문에 내 취미에 맞지 않는 꽃을 키우게 되었다라 했습니다.

그렇게 꽃을 2년을 키우더니 집을 팔고 이사를 가 버렸습니다.

 

 

 

 

 

성실한 사람이 반드시 잘 살아 지는 세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바로 설 수 있고, 어디에든가서 당당할려면 진실되고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친구 중에는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공장을 하셨고, 아주 엄하셨는데, 그냥 춤을 배우고 싶어서 용돈을 아껴서

한국무용을 가르치는 학원에 다녔고, 어떤 대회에 나가 상까지 탔으니 어쩌면 허락 해 주실지 몰라서 집에 알렸다

머리 깎이고 그 꿈은 접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학과를 나와서 좋은 직장에서 명퇴를 한 다음에 준서할미랑 만났는데,

그 때가 50대 초반이었습니다.

치마 길이 무릎까지 오는 늘 정장차림이었고, 바지를 입고 출근은 해 본일이 없다하고 구두는 자주 바꾸어 신는데,

그 구두에는 비즈 장식도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10여년이 흐른 지금에  직장을 접고 손주 2명을 키우면서 아들네와 합가를 해서 삽니다.

할머니가 되더니 바지도 입고, 편한 신발도 신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좋은 옷을 입어 본 때가 나는 것은 그나마 환갑 이전이라 합니다.

살아가는 가치관이 환갑 전후로 바꾸어 진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