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바른생활 아이와 진실한 사람.....

이쁜준서 2015. 11. 24. 06:30

 

 

실내에서 핀 가재발선인장

 

우리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각자 부산에서 시골 아버지 고향으로, 전학을 같은 반으로 갔었던, 동무를,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중학교는 졸업까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고 지내다, 부산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나게 되었습니다.

길 가다 만나고, 얼마나 반가워 했는데도 다시 만나지 못했고 그런대로 60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국민학교 동기동창이 준서할미 고향으로 우리 사촌동생을 찾아 사촌동생은 서울 숙모님께 전화번호를 물어

알려 주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교사가 되고 제일 처음으로 담임한 반 아이가 제 사촌 동생이었다 했습니다.

 

내용인 즉 자기가 초등학교 교감으로 정년퇴임식을 하는데, 자기와 그동안 만나 왔던, 동기들이 다시 각자 연락되는 동기들에게 연락해서

퇴임식에 참석하고 몇 십년만에 동기회를 갖고자 한다고, 참석 해 달라는 내용이었고,

아무도 너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어 죽었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뒤에도 그 때 마침 울산의 해변가에서 외사촌 동생의 딸 결혼식 뒷푸리를 하고 있는데, 울산이라면서 어디냐?

우리가 고향 읍에서 만나고 있다면서, 오라고 하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정년 퇴임식에도 동기 몇명이 모였다는 곳도 가지 않았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과 그들이 모이는 곳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자주 만나지도 못할 것이고, 그냥 기억을 해 보면,

예전 국민학교 여름방학 후에 만나면 자기 얼굴 그을은 것은 모르고, 친구의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하얀 잇발이

우스워서 서로서로 얼굴 보면서 까르르 까르르 웃던 그 때 모습이 정확하게 기억 되지 않아도 그 때로의 기억도 괜찮겠다 싶어서.

그 어릴적 동무 전화번호도 폰을 바꾸면서 입력하지 않았습니다.

 

 

 

 

실내에서 피고 있는 서양란

 

준서할미 세대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에도 전체 사회는 가난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철도공무원을 하는 아버지를 둔 집 딸도 동생들이 있으니 고등학교 진학을 해 놓고 중간에 자퇴를 하고 돈벌러 나가는

아이들도 있었던 그런 사회 환경이었습니다.

 

결혼을 먼저 한 사람, 좀 더 늦게 한 사람들이 각각 다른 지방에서 결혼생활을 하게 되니, 졸업 후 정기적인 모임을 하던 친구들이

만나지지 않아서 그 정기모임도 없어져 버리고 한 둘이씩 1~2년만에 전화 통화 한 두번 하고 지냈습니다.

우리나라가 70년대말에서 80년대 초기까지 나라 살림살이가 윤택 해 지면서 그 시절 서울로 서울로 모여 드는 때 였지요.

어느 날 우연하게 아파트 단지에서 만나  지기도 하고, 누구를 보았다, 나는 누구를 보았다 그렇게 한 사람을 건너 건너서

37명이 서울에 와 살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기도 했다 했습니다.

또 소그릅으로 모이기도 했는데, 이 그릅과도 만나고, 저 그릅과도 만나는 사람이 있어서 맘만 먹는다면 37명이 다 연락이 닿을 수도

있었다 했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에는 신기해서 만나기도 했었지만, 살다보니 하나 둘씩 연락이 닿지 않게 되고, 같은 서울에 살고 있어도

전화도 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는다 했습니다.

10여년 전에 친구 아들 결혼식에 참석해서 우르르 모인 친구들과 만나고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제는 우리가 나이가 제법 많은데, 이제는 한번 만나고 연락하고 살아야 겠다 싶어서, 어찌 어찌해서 만나고 싶은 친구 3명과

전화 통화를 했고 한번 모이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나라 전체가 경제 사정이 어렵던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던 그 시절의 친구들을 이제는 보면서  살아야 겠다 싶습니다.

 

여담이지만, 그 시절에는 요즘처럼 은행에 가서  분기별로 내지 않았고, 학교 서무실에 창구가 밖으로 나 있었고, 그  앞에서

한달분 고지서와, 돈을 내밀고 공납금을 내었는데, 공납금이 밀리지 않고 내는 학생이 절반도 않 되었지요.

교무실에는 오후가 되면 공납금 받은 현황표가 세워지고, 담임선생님께서는 종회시간에 들어 오셔서 다구칠 수 밖에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그린 극빈은 그 당시 부산을 다 그리지 못했더라구요.

겨울에 산동네 좁은 길은 얼어 붙으면 연탄재를 던져도 워낙 경사가 있으니 낙상도 많이 당했는데, 우리가 졸업을 하고

몇년 뒤 산동네 재개발로 도로가 생기고, 버스가 다니게 되기도 했었지요.

오늘 연락 된 친구 중에는 아미동 산동네에 살던 친구도 있습니다.

 

 

 

실내에서 피고 있는 흰색 가재발 선인장

 

 

그중 한 친구가 너는 우리들이 너 이야기를 하면 너 이름을 모르는 아이도 [바른생활 아이]라 하면 넌 줄 알았는데,

그 당시 사립학교는 이중 출석부를 했었고, 실제는 70여명이었고, 13반이었으니 한 학년만 해도  대단히 많은 학생 수였습니다.

 

이제는 [진실한 사람]이 되었네 해서 웃었습니다.

부부만 남아서 김장도 하지 않고, 주문해서 사 먹는다 하는 친구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 하다가,

나는 김장을 40포기를 하고 메주 쑤어서 장도 담고, 찹쌀가루 삭혀서 고추장도 담아 먹는다  했더니

[진실한 사람]이라해서 웃었습니다.

[바른생활 아이] 도 [진실 한 사람]도 융통성 없다는 뜻도 되고, 반가워서 호의를 담은 말이기도 할 겁니다.

 

오늘 전화 통화 한 친구중에 한명은 술 한방울 마시지 않아도 상에 젓가락 장단 치면서 노래 하던 친구도 있고,

고등학교 시절, 울산에서 부산으로 갔으니, 아무래도 부산에서 살고 있었던 아이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을 겁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세워졌던 2동의 낡은 목조 건물과 넓은 운동장에는 고목의 겹벗꽃 나무가 있었는데,

신식교실과 운동장은 인조잔듸가 깔려 있고,

오일장이 열리고,  그 장에는 소를 팔고 사는 장도 있었고,

큰 솥단지 걸어 놓고 쇠고기 국밥 파는 곳은 장에 오는 남자 어른들의 큰 사랑방이였었는데,

너무 많이 변해서 다 생소 했었습니다.

 

 

 

 

 

 

2년전에는 졸업한 초등학교도 찾아 가 보았고,

어린시절 살았던, 지금도 막내 숙모님이 사시고, 친척들이 사시는 아버지 고향으로 추억 여행을 하기도 했고,

친정 조부모님 산소도 찾아 보기도 했었습니다.

지난 인연을 찾게 되는 것을 보니, 나이가 들만큼 든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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