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만 해도 시골에서는 長利 쌀이란 것이 있었다.
식량이 모자란 농촌 집에서 설명절을 어찌 어찌 보내고, 보리 수확을 하기까지 식량이 없어서
쌀을 빌려 먹고, 그 해 가을 벼 수확을 해서 연 5할의 이자를 치면
한말 쌀을 빌렸다면, 쌀을 한말 반을 갚는 이자로 치면 고리이지만, 그 때의 농촌에서는 대대로 내려온 것이라서
따로 고리라고 말하는 사람 없이 그렇게 빌려 주고 받고 했던 것이고,
가을에 수확을 하면 꼭 갚는 것은 불문율이었다.
준서할미가 초등학교 시절에도 시골에서도 면사무소에서 쌀, 밀가루가 배급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죽을 끓여 먹고 어찌 어찌 지내다 보면 보리농사 지으 것을 먹을 수 있게 되어 장리쌀을 먹는 집은 없었다.
준서할미가 초등 5학년 때인가?
동네 친척어른들이 모여서,쌀을 얼마간(정확한 양은 기억에 없고) 아이들 몫으로 내어서, 장래쌀을 필요한 집에
놓던가? 아니면 돌아가면서 그 쌀을 먹고 가을에 갚고 그렇게 아이들 결혼할 때 쓸 돈으로 모아서 기르자고 했다.
처음 내었을 때는 미미한 것이였고, 준서할미는 초등 졸업 후 고향을 나와서 그 후는 모르겠다.
친정고모님 말씀으로는 너그 숙모가 탔는데, 제법 돈이 된다 하더라 하셨지만, 그냥 묻지 않아 모른다.
장리 소
준서할미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가난한 집에서 송아지라도 살려면 거금이어서 살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면 넉넉한 집에서 암송아지 한마리를 사 넉넉하지 않은 집에 맡기면,
송아지를 길러 어미소가 되어 송아지를 낳으면, 어미소는 송아지를 사준 주인에게로 보내고, 낳은 송아지 차지가 되기도 했다.
그런 집은 우리 동네에서도 서너 집이 있었다.
그 때는 여름이면 들에 풀을 먹이러 나갔고, 겨울에는 볏짚에 콩깍지도 넣고, 쌀겨도 넣고, 죽을 끓여서 먹였고,
농사용으로 쓸 한마리 정도 먹였으니 소 먹인다고 사료값이 들던 시절은 아니였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 소사료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송아지를 위탁 받아 키워서 에미소로 키워서 송아지를 낳아 그 낳은 송아지가 내것이 되는 것은
참으로 큰 기쁨이었던 시절이었다.
쇠고기를 설명절을 앞 두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잡아, 몫을 내어 넉넉한 집은 한 몫을, 그렇지 않으면 한 몫을 반으로 가르고
1년에 쇠고기를 한번만 먹을 수 있던 시절이라,
소가 가족이었고, 가족처럼 키워서 소시장에 내다 팔면 몫돈을 만질 수 있는 저축이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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