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는 많아야 열가구 정도, 아니면 3~4가구가 있고, 또 한참을 걸어 가면 또 몇집이 있고,
아주 큰 마실은 아니였습니다.
같은 성씨들이 사는 작은 마을이 몇군데 합쳐서 대소가가 제법되는 그런 마을이었습니다.
우리집은 다섯가구가 있는 마을이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자라실 때는 더 작은 집이였는데, 그 다섯집 중에서 제일 큰 집이였던.
할아버님대에서 사촌이셨던 집과 살아 오다 바꾸신 집이였습니다.
바꾼 집이 컸다고 해도 원 우리아버지가 낳고 자라던 시절의 집은 초가삼칸이었다면,
바꾼 집은 초가이긴 했으나 정지, 안방, 마루방, 또 한칸방이 있었고,
사랑채는 방 한칸에 쇠외양간이 들어 있었고, 또 방앗간과 통시와 잿간이 있는 집이 또 있었고,
울타리는 싸리로 되어 있었고, 삽작문도 나무가지로 얼기설기 만든 문이였습니다.
안방에는 문을 열면 천정에 줄을 달아서 갓도 걸어 놓고, 종이로 만든 봉투에 씨알을 넣어 달아 놓았고, 이런 저런 귀중한 것을 넣어 두는
일본인들이 말하는 오시리가 있었는데, 뭐라 부르는지는 지금 기억을 못하겠습니다.
그 때 논이 20여마지기가 되어서 5촌아재가 머슴으로 있었고, 마당도 제법 넓었고,
울타리 밖에 양켠으로 채전밭이 있었고, 철로 밑으로 또 논도 해도 되고, 밭도 해도 되는 땅에는 뽕나무가 있었습니다.
누에를 본 적이 없는데, 우리는 누에를 치지 않았지만, 다섯집 중에 누에를 치는 집이 두집이나 되었지요.
정말 작은 벌레가 나중에는 뽕잎을 갉아 먹는 소리가 비오듯 했고, 그 누에가 고치를 만들었고,
고 고치를 다 거두어 어디엔가 갖다 주었지요.
벌레가 와글와글 저에게는 누에는 벌레였고, 겁이나서 만지지도 못했었습니다.
그 누에를 치는 친척집에는 부산에 결혼 한 큰아들이 나가 있었고, 경주로 중 학교를 다니는 작은아들이 제게는 7촌아재가 되었지요.
제게는 할머니가 되셨고, 처녀 고모가 있는 세 식구가 살고 계셨던 집이 였습니다.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집이여서 처녀고모들이 모여서 혼수용 수를 놓았지요.
수 놓는 것은 비단천에 비단실로 베게모도 수를 놓았고, 옥양목인가? 광목인가?에 십자수로 큰 횃대보를 수 놓았습니다.
횃대보라는 것은 그 당시 거들막스런 장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궤짝이란 것이 있었고,
옷은 궤짝 안에 착착 개켜서 넣어 두었고, 이불은 궤짝위에 예쁘게 포개어 얹어 놓았고,
출입할 때 입는 입성을 큰 대나무에 끈을 달아 벽에 걸어 놓고, 그 대나무에 옷을 걸어 놓고,
그 옷들을 수 놓은 횃대보로 덮어 두는 꼭 처녀들이 해 가는 혼수품이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면에는 중학교가 없어서, 경주까지 5리쯤 걸어 올라가서 기차를 타고 중학교를 다녔던
그 아재는 인물도 좋았고, 도시로 나간 사람들 말고는 고향에서는 멋지게 교복을 입고 다니는 중학생이었습니다.
부산이란 대처로 나간 형이 있어 공부를 시켰지요.
그 아재가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면 봄이면 진달래는 학교 가는 길옆 야산으로 올라도 흔하디 흔한 것이였어도 제게 꺾어다 주셨고,
산딸기 철에는, 기차역에 내려서 집으로 걸어 오는 5리쯤 되는 길에 야산으로 올라가 산딸기를 도시락에 하나 가득 따다 주셨지요.
할머니도 후하셨고, 고모도 저를 이뻐 하셔서, 늘 가면 고구마도 얻어 먹고, 수 놓다 남은 헝크러진 비단실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초등 4학년부터 고향에 있을 때 중학생이셨으니 지금도 울산시 어느 곳에 계실텐데도,
어느 잔치에선가 울산에서 만났는데, 전화번호도 건네지 못하고, 그냥 헤어졌습니다.
어린아이에게 그렇게 잘 해 주신 것은 지금도 고향생각을 하면 훈훈하게 해 주는 참 아름다운 추억중의 하나입니다.
아무도 주지 말고 너 혼자 먹어라하면서 알미늄 납작한 도시락에 가득 담겨 있던 그 산딸기 만큼 맛있던 산딸기는 없었습니다.
딱이 그런생각을 하고 살지는 않았는데,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하면 그 아재가 도시에서 온 어린 조카에게 해 주었던
그런 인정이, 군 음식을 먹을 때 옆에 있지 않아도 챙겨 두었다 주셨던 할머니와 고모의 인정이,
준서할미가 누구엔가에 배려 할려하는 맘의 씨앗이 된지도 모릅니다.
물론 우리 엄마의 경우 바르신 교육도 있었겠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음은 사람이어서 가능한 씨알 같은 일입니다.
고향의 진달래꽃핀 야산도, 산토끼를 쫓던 일도, 겨울이면 우리 사랑에서 새끼를 꼬던 남자 어른들이,후랏시를 들고
초가지붕에서 참새를 잡아 참새를 넣고 밥국을 끓이던 그 정경도 다 그립습니다.
어느 집을 가던 먹거리가 있으면 나누어 먹었던 그 인심도,
새벽 날이 새기전 가을이면 밤을 주으러 가만 가만 호랑이 할아버지 밤나무로 가면 성공하는 날도 있고,
호랑이 할아버지 감시하러 나오시기에 몇개 주어서는 줄행랑을 쳤던 것도 다 그립습니다.
채전밭에는 단감나무가 두 그루 있었고, 마당 안에는 참감나무가 3개가 있어 학교 다녀와서는 감을 따러 감나무도 탔습니다.
몸이 재빨라 나무도 잘 탔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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