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옛이야기 4 - 메뚜기 잡기

이쁜준서 2011. 12. 25. 08:30

학교 가는 길은 십여리길이였다.

동네 아이들이라고 해도 초등학생인 준서할미에게 아재비뻘이고, 고모뻘이고, 항렬이 낮아서 언니, 동생간이었고,

아침에는 각자 집에서 먼저 나오는 사람이 어느 집 앞에서

"학교 가자" 하고

그렇게 한명이 두명이 되고,4~5명이 되어서는 한참을 내려가면 타성들이 사는 동네에서 반 친구를 만나기도 했고,

또 더 내려가 우리집에서 5리 정도 떨어진 동네에서 또 반 친구가 만나지기도 했다.

오전 반 때 그랬고, 오후반 때는 5리 떨어진 동네에 사는 친구와 철로 둑 밑으로 그 동네에서 나오는 길이 연이어져 있는데,

그 철둑 밑에 약간의 홈이 파여진 곳에 나무 꼬쟁이를 두고 혹여 만나지 못하고 지나가게 되면 나무꼬쟁일 세우두고

나무 꼬쟁이가 세워져 있지 않으면 늦지 않다 싶으면 기다려 같이 가기도 했다.

 

돌아 올 때는 거의 반친구들과 오는데, 오다 각자 동네로 들어 가기에 사람수는 줄어 들었다.

그 때는 못자리를 논에 직파하던 시절이라 못자리 놓는 것이 요즈음 보다 늦었고,

가을 추수도 늦었다.

추수 할 때가 되어 오면 논에 도구를 치고 물을 빼고, 벼를 낫으로 직접 베어서는 논바닥에 눕혀 놓기도 하고,

한아름이나 되는 뭇단으로 베어 논둑에 세워서 말리기도 했다.

 

가을이면 벼메뚜기를 소풀멕이러 가서도 잡았고, 일부러 메뚜기를 잡으러 가기도 했다.

참기름짤 때 쓰는 깨주머니라고 묘하게 생긴 것이 있는데 그 깨주머니를 가지고 나가기도 했다.

아마도 자루보다는 작았고, 그 작은 아구리를 손으로 꼭 잡을 수 있어 깨자루를 사용했지 싶은데, 쇠죽을 끓이면서 쇠죽 솥에

자루를 위에 얹어 일단 익혀서는 날개도 떼어내고 다리도 떼어내고 그렇게 고추장에 마른멸치 볶듯이 반찬을 만들어

도시락 찬으로 가지고 갔었다.

어른들 막걸리 안주로도 했었고,

 

그러니 가을이면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논으로 들어가 강아지풀 하나 뽑아서 메뚜기를 잡으면서 오기도 했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인가?

철 없는 어린아이들이 논둑의 뭇단 벼에서 메뚜기를 잡다가는 어느새 그 뭇단 볏단이

뜀틀이 되는 듯 훌쩍 훌쩍 뛰어 넘기도 하고, 뛰어 넘지 못하면 볏단 위에 털석 주저 앉기도 하고, 앉은채로 엉덩이를 돌려 내려 오기도 하고.....

그리하였으니 이제 건드리면 떨어질 벼 낟곡을 걱정할  주인이 멀리서 우리들 보았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정말 그 주인이 가까이 와서야 알게 되었고, 그 때 주인과 어린준서할미는 가장 가까운 거리였고,

도망을 친다는 것이 바로 철뚝이었는데, 기차가 오는지를 볼 생각도 못하고 냅다 뛰어 철로로 올라 갔고, 또 철로를 뛰어 건넜고,

철로를 건너자마자 기차가 지나갔기에 하마터면 큰 사고가 났을 수도 있었다.

그 어른도 아마도 혼비백산 했을 것이다. 어찌 되었던  도망가는 아이를 쫓았고, 그렇게 되었으니.

잡은 아이 몇을 그리 혼내지 않고 놓아 주셨다.

그 후는 메뚜기를 잡으러 학교 갔다 오다가는 논으로 들어 가지 않았다.

그 들은 타성받이들이 농사 짓는 남의 동네 논이였다.

 

메뚜기들이 보호색을 입기에 벼가 누렇게 익어가면 메뚜기도 누렇게 변한다.

소 멕이러 가 그렇게 이리 저리 뛰던 메뚜기들이 해가 질무렵이면 덜 보인다.

메뚜기들도 잠을 잘 준비로 풀잎 뒤로 땅의 풀잎 밑으로 들어갔지 싶다.

먹는 것이기보다 잡는 재미가 좋아서 그리 열심히 메뚜기를 잡았을 것이다.

 

재작년에 들에가 메뚜기를 잡아와서 쪄서 말려서 냉동실에 넣어 두었는데도 먹어지질 않는다.

파계사 구경을 하고, 제2석굴암을 구경하러 한참을 승용차를 타고 가 그동네에서도 잡아 보태어 놓았지만,

어려서 늘 먹던 것이라 먹을 수 있지 싶은데도, 생각뿐인지 그냥 넣어 두고 있다.

방아깨비를 잡아서 아궁이에 구워서 참 잘도 먹었는데, 10여년 전 한번 구웠는데, 먹어지질 않았다.

준서는 3~4살 적에 방아깨비를 잡아 주면 뒷다리를 잡고 까닥거리는 방아깨비를 가지고 놀았고,

수명을 다해 땅에 떨어져도 움직임이 있는 매미나  잠자리를 잡아 주면 가지고 놀았는데,

우리 아이들은 대학생 때도, 지금도 매미나, 잠자리를 준서 가지고 놀게 실내로 들였으면 기암을 한다.

 

준서할미 중학생 때, 집앞이 논이여서 물꼬로 논물이 넘쳐 흘러내리면 때로는 미꾸라지가 있었다.

그러면 학교 가다말고 미꾸라지를 잡아 집에 들여 놓고 갔었고, 여름 논둑에 대나무로 끝을 갈라서 넙적하게 해서는

개구리를 잡아 푹 삶아 닭에게 주면 닭이 아주 튼실하게 자라서 개구리도 잡았고,

추수가 끝난 논에서 미꾸라지도 잡았고, 논고둥도 잡았었다.

 

지금이사 자연보호라는 말도 있고, 자연 훼손이라는 말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껏해야 장독 곁이나, 사랑채 앞에 비비추를 산에서 파와 심는것, 꽃색이 고와서 나리류를 한뿌리 캐와 심는것은

자연훼손이랄 것도 못 되었다.

그 때는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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