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니는 5남내에 딸이 셋이신 중에 둘째 따님이셨다.
여형제분들이 다 부산에서 살으셨는데, 외할아버님, 생신에, 외할머니 생신에 울산의 친정으로 모이셨고,
외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기제삿날에, 외할머니 생신에 또 친정으로 모이셨다.
외삼촌이 일본에서 전문학교를 나오시고 해방이 되어 한국으로 솔가 해 고향에 자리 잡으시고는 면서기를 하셨다.
그러니 농사일은 외할머니와 외숙모님께서 남정네 농사꾼이 없어서 아랫채에 집 없는 사람 가족을 들이시고,
농사일을 도우면 품삯으로 쳐 드리면서 농사 일을 하셨던 집이다.
그러니 외숙모님께서는 농사일도 하셔야 하고, 집안 일도 하셔야 하는 일이 참 많으신 분이셨는데,
결혼한 시뉘나 객지에 나가 공부하는 시뉘- 세 시뉘들이 왔다 가고 나면 빨래감이 많아서 또 힘이 드셨다.
그런 중에 우리 친정엄니는 언제나 자기 갈아 입을 옷을 가져 오셔서 좋다라 하셨다.
그런 영향인지 준서할미도 어디를 가나 옷들 준비해 가는 것도 있지만, 작은 타올을 두장 넣어 가서는 그 댁 타올 수건을 사용하지 않는다.
외할아버지가 가시고, 외할머니가 계신 때엔 엄니 자매들이 친정집에 갔는데,
외할머니는 준서할미가 중학생 때 가셨는데, 2년상을 낼 때까지는 친정을 가셨지만, 그 다음 기제사는 가시지 않으셨다.
기독교 신자이시기도 했지만, 엄마가 없는 친정은 친정 같지 않다 하시면서.
준서할미 친정엄니께서는 남동생과 같이 사셨다.
엄니가 계시지 않은 남동생집은 친정 같지 않아서 엄니 가신지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후로는 참석하지 않는다.
그냥 부산에 이모님이 계셔서 이모님과 외사촌언니를 만나러 갔다가 동생들을 보고 올 뿐이다.
즈그들 집을 가기도 하고, 누나 왔다고 와서 밥을 사주러 동생들이 오게 되면 보기도 할 뿐이다.
친구들도 그렇게 말한다.
친정 엄니가 가시고 난 뒤로는 친정을 가기 싫어지고, 몇번 가다보면 기제삿날에도 가지 않게 된다고.
나이가 먹어가니 친정동생들에게 더 애틋함은 있는데도 일부러 동생집을 가지 않게 되고, 가더라도 잠시 잠깐이지
하룻밤 묵게는 되지 않는다.
어린 손주들이 친가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가족이라 하지 않는다.
준서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살다 다섯살에 엄마, 아빠에게로 갔다.
다섯살, 여섯살에는 친가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가족이라 하지 않아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가족이라 했다.
일곱살에는 아니라 했다.
왜? 라 물었더니
같이 한집에서 살아야 가족이라 답했다.
준서에미 세대들이 예쉰이 넘고, 일흔이 되는 때는
자식이라고 1~2명인 이 세대들이 그 자식들마저도 한국에서 살아질런지도 모르는데,
그 맘의 외로움을 어찌 견딜지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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