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노년의 부부 1 ... ( 신혼이 없었다)

이쁜준서 2008. 11. 12. 00:04

 

내 고향에서는 필기라 불렀던 다년생 풀

가을색이 곱다.

 

텃밭에 가는 준서할미를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준서외할아버지다.

운동에, 텃밭에, 산행에 늘 체력의 한계로 지내다보니, 무리하면 늘 표가 나기에 못마땅한 것이다.

 

결혼 초 시엄니, 시동생들, 시누이들과 함께 살았기에,남편 올 때까지 같이 밥 먹으려고 기다려 본 적이 없었다.

일찍은 저녁밥을 지어 먹고 설겆이까지 끝내었다고, 어쩐지 민망해서 우리 방으로 갈 수가 없었다.

1970년도 초여서 각 가정에 TV 가 없었고,

만화방에서 동네분들이 모여서 연속극 "여로" 보던 시절이었다.

저녁을 먹고 어두워지면, 홀치기털을 들고 우리집으로 모이셨다.

새댁은 너거 방으로 가거라 하시면서도 속내는 갓 결혼한 새댁을 그 좌석에 있는게 좋아 하셔, 밤이 이슥해서, 당신들 집으로

가실 때까지 함께 있었다.

발은 저리고, 자세를 바꾸어 앉으면서, 처음 두어달은 고역이었다.

준서에미를 임신하면서 놓여 났었구.

비단 홀치기를 하시면서,당신들의 지난날의 이야기, 당신들 집안 이야기, 들었던 이야기들을 하시면서.

대구라는 대도시였지만, 그 어른들의 인정은 호롱불에 모여서 바느질도 하고, 길쌈도 하고 지냈던  예전 같았다.

 

 

그 시절에는 간식거리로 과일을 사 두고 먹을 수 잇는 시절은 아니었다.

무나 생고구마가 있으면 깎아 먹고, 주전자로 막걸이를 받아, 한잔 하시기도 했다.

여름에 부추에 풋고추를 넣고 전을 구워도, 막걸리를 사다 동네분들이 모두 오셔서 같이 한잔들 하셨고,

점심에 국수를 삶으면, 넉넉하게 삶아 또 오셔서 같이 잡수셨고,

낮 시간에 다른 집에 모여서 비단홀치기를 하시고는 저녁 때 홀치기일을 파하고, 막걸이 한 주전자가 두 주전자가 되는 날엔

여름날은 덩실덩실 춤을 추시면서 우리마당으로 오시기도 했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인 된 - 말하자면 새댁을 거쳐 살림 때 묻은 시절에는 장마가 지는 여름날에는 찹쌀 새알을

비벼 - 쇠고기를  넣고, 찹쌀 수제비를 해서 여름에 두어번을 대접 하기도 했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시어머님 생신 때도, 아이들 생일 때 떡을 하면, 운동회 때도,10월 상달 고사 때는 동네잔치이기도 했다.

큰댁, 우리집, 작은댁 뚝뚝 떨어져 살았어도 한바퀴 돌면서 차사를 마치고, 산소까지 들렸다, 오후 늦게는 시어머님 친구분들 중에서

부모님 모시는 댁으로 상을 차려 문안 인사를 가기도 했었다.

준서에미가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그 분들이 노인분들이 되셔서, 구정 전 날 밤에 마실것을 사 문안 인사를 한바퀴 돌기도 했었다.

명절때나, 소풍이나, 운동회 때엔 준서에미 형제에게 동네 어른들께서 용돈을 주시기도 했었고.

김밥 30줄은 만들어 드리고 가기도 했었다.

우리가 이사를 나올 때는 동네어른들이 나를 잡고 우셨다.

너는 우리 며느리 같았다 하시면서.

 

준서외할아버지가 중학생 때 부터 살아 온 동네라, 친정을 갔다 오거나, 외출에서 돌아 올 때는 아기였던 준서에미를 준서외할아버지가

안고 오다 아직 집 근처까지 오지 않아도, 아기적 준서에미를 주고, 기저귀 가방도 주고는 앞서 집으로 가버렸다.

동네에 아기를 안고 다니는게 미안스러워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러면 대문에 혼자 들어서는 아들을 보시고는 시엄니께서 마중을 나오시거나, 미처 나오시지 못하시면 동네 어른들께서 가방을

들어 주시거나 아니면 아기였던 준서에미를 받아 안으시고 준서할미가 친정이라도 갔다 오는 길이면, 아기였던 준서에미를

몇일 못 보셨던지라 우~우 같이 우리집으로 들어 오셨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월급봉투를 직접 받는 때여서 월급을 받아 맛있는 것을 사 오기도 했었던 시절이라, 총각인 준서외할아버지도,

월급날은 간식거리를 사 들고 왔었다 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안사람인 내가 있으니 사올 수 없다면서, 그 때부터 월급날도, 무삼 날도 빈손이었다.

 

그렇게 신혼을 무덤덤하게 살았고, 정지간이 신발을 신고 나가야 했기에, 물 한컵도 달라했고,그러면 떠다 주고 살았다.

그랬던 준서외할아버지가 준서를 낳고, 산후구완를 하러 집에 와 있을 때부터 변했다.

산모도 챙기고, 아기 우유병도 삶아야 하고, 천기저귀, 아기목욕등등  준서할미가 체력의 한계이다 싶으니 사람이 돌변했다.

때때로 준서젖병을 삶아주고, 청소도 해 주고 많이 도와주었고, 다시 준서를 거두게 되면서는 더 많이 도와 주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텃밭에 준서외할아버지가 갔다.

배추포기를 묶어 주는 것도 도와 주었고, 먼저 올라가서는 다시 준서할미가 든 짐을 받아 주었다.

늘 삐그덕 거리는 준서할미가 걱정되어 도와 준다.

 

오늘도 홍시용으로 대봉감을, 사과를, 배를 사 왔다.(15Kg 들이)

준서할미도 힘이 들어도 평소 같으면 한 상자는 올리는데, 다리가 아퍼서 준서외할아버지 혼자 다 올렸다.

노년이 되면서 부부간은 서로가 보호자이다. 글자 그대로 보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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