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바쁘고, 멀리 떨어져 있다.
나는 큰 아이가 취직을 멀리 해서 작은 아파트 전세 얻어 살림 내어 주고는
그 때 필요한 짐을 싣고 올라가면서 내게서는 떠난 것은 아니나 내 품에서는 떠나구나라 했다.
그러다 2년인가 있다가 둘째가 대학원을 언니가 있는 곳으로 가서 했다.
그러면서 또 품안의 그렇게 이쁘기만 하던 자식하나도 떠나 보냈다.
큰아이가 첫 해는 주말이면 왔고, 그 때는 맛난 음식들을 많이 하니,
둘째가 나도 나가 살면 엄마가 언니 때처럼 맛난 음식 해 줄건가요?
그래 그래 했었다.
대문 앞이 소방도로이고, 3층 현관에서는 소방 도로 일부가 보이고,
소방도로에서도 그 정도로 보이고,
아이들이 와서 현관 앞에서 서서 안았는데 소방도로 지나던 사람이 쳐다 보고 웃고 있기도 했다.
둘이서 같이 있으니 주말에 집안 일도 해야 할 것이고 오는 빈도가 한달에 한번 정도 오더니
달을 뛰어 넘기도 했다.
흐르는 세월 속에 큰 아이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친구들은 내어 놓았던 딸이라 덜 섭섭할거다 했다.
그런데 데리고 있던 딸은 더 한지는 몰라도, 낮시간 모르겠는데,
저녁 해가 질려 하면 뒷퉁수를 누가 갑작스럽게 때리듯이 눈물이 났고,
옥상정원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두 아이다 결혼 때마다 나는 두 아이들을 내 품안에서 영영 떠나 보냈다.
아기 준서를 데리고 있게 되면서 두 아이들 생각을 별도로 하지 않고, 가끔식
옥상을 둘러 나가는 바람처럼 두 아이들이 생각 났을 뿐이고,
준서가 있으니 아이들은 자주 왔다.
준서를 다섯살에 보내고는 늘 밤에 잘 때는 일단은 할머니 품 속에서 있다가
잠이 오면 품 안에서 빠져 나갔던 정말로 늘 안고, 업고 다니던 준서를 품안에서 놓았다.
준서는 방학이면 왔다가 2주쯤 같이 있다가 갔다.
초등고학년이 되면서는 준서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품안의 자식들은 자기들 둥지가 생겼다.
이제는 보면 반갑고,
안보는 세월동안 아이들을 오매불망으로 그리워 하지 않는다.
한끼 밥 아무리 잘 먹어도 다시 끼니가 되면 배가 고프듯이,
아이들도 만나면 좋지만, 그렇다고 자주 만난다고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닐 것이고,
코로나 중에는 3년만에 둘째네 식구를 만났고, 큰아이네 식구는 2023년 결혼식차
서울 가서 큰아이네에서 2박 3일을 있다 왔다.
내가 본시도 체중이 많이 나가고 많이 먹고 하지 않는데,
4년만에 본 엄마는 아마도 많이 늙어 있었을 것이고,
전과는 달리 설거지 하나 하지 못하게 하고 밥도 저그들이 차려 주었고,
준서가 밥을 같이 한번 먹었는데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 하는 준서를 보면서 딸이 하는 말이 아마도 할머니가 오셔서 설거지를 하는 듯 하다고.
그냥 자식들은 멀리 있으니 전화에는 안부를 물으면 잘 있다고 한다.
자식들은 품안에서 나갔다.
오랫만에 만나도 어린 하늘이는 할머니를 좋아 하니 고마울 뿐이고.
아무리 성대하게 잘 차린 음식을 먹어도 한 끼니 정도는 건너 뛰기는 해도
다시 끼니 때가 되면 배가 고프다.
자식들 보고 싶은 것도 자주보나 한참만에 보나 보고 싶은 것은 같은 것이고,
그 마음에서 놓여 나 살고 있는 것이 내 현주소이다.
1월말에 준서네 식구가 온다고 했다.
내 건강이 병원 다니면서 내 생활 할정도이고, 그 중에서 팔이 아픈 것은 정말로 일을 할 수가
없어서 내 집이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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