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겨울 시작이다.
잠자고 나면 아침이듯이,
이 겨울이 하루 하루 지나가면서
자연은 이런 봄을 준비해 줄 것이다.
내가 자랄 때는( 우리 세대가) 지금에 와서 새삼 생각해 보아도 어리다고 봐 주는 것이 없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했다.
농번기에는 가정실습이라고 일주일 학교 가지 않고, 집에서 정말로 집안 일 도우는 일을 했다.
모내기 철에 품앗시로 동네 일군들이 자기 집 논에 모내기를 하고, 들 밥을 내어 가야 하는데
아기는 자꾸 울고 하면 아쉬우면 7살 여자 아이에게 아기를 업혀 놓고 일을 하셨다.
처음에는 아기가 제법 등과 어깨 쪽으로 업혀 있다가 아기는 점점 내려 와서 엉덩이 짬에 처지고,
아기 다리는 업은 아이 엉덩이 밑으로 처지고, 엄마가 오가면서 바쁘게 일 하시다
다시 아기를 업혀 주고 띠 끈을 매매 묶어 놓아도 아기는 또 엉덩이에 내려 오고.....
그렇게 우리들은 동생도 보았고, 학교 갔다 와서는 소를 몰고 들에 소풀 먹이러 갔고,
4월 이른 봄에 손 호호 불면서 쇠죽 끓이는데 햇풀 호미로 캐어서 쇠죽에 넣어 준다고,
호미들고 풀 뜯으러 들이 나가기도 했다.
소 맛나는 햇풀 먹인다고 귀한 딸들을 그 추운데 호미들고 들에 풀을 캐러 내 보내셨다.
밤이면 바느질 하시는 엄니 곁에서 우리들 양말은 우리가 발 뒷굼치 쑥 나오게 구멍이 난 것을
헌 양말을 가위로 잘라 메꾸고, 발 바닥이 떨어진 것은 또 납작하게 끊어서 양말 밑바닥에 대어서
볼을 받았고,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의 아버지 고향 시골은 호롱불을 켜고 지냈다.(부산은 전깃불이 있었는데)
그 희미한 호롱불 하나 켜 놓고, 우리들은 숙제를 한다고, 또 엄니는 바느질을 하시고,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춘추복, 하복은 면으로 상의를 맞추었는데,
면이다 보니 가끔 손빨래를 해서 삶아야 했는데 시골에서 할머니 주무시는 방에는 솥이 걸려 있는데,
그 솥에 아궁이에서 재를 퍼서 물을 부어 내린 잿물에 삶아 씻고,
또 마르면 갈분을 소매부리와 카라에 먹여서 빳빳하게 조선 다리미에 숯불을 넣어서 중학생이라도
제 교복을 그렇게 손질 해서 입었다.
온통 할 수 있는 일을 했지 일하지 않고 귀여움만 받는 아이들은 동네에서 없었으니
당연한 듯이 지냈을 뿐이였다.
내가 딸아이들에게 전혀 집안 일을 시키지 않았다.
여자들은 엄마 밑에서 자랄 때 편안한 것 말고는 정말로 몸이 편한 것은 없다 싶어서였다.
아마도 아기 낳아 키우면서 자랄 때 일을 배우지 않아서 더 힘든 시기도 있었겠지만,
앞에 놓인 일은 어찌 하던 다 하기 마련이라 이제는 적응을 했을 것이다.
우리 세대의 할머니들께서는 남의 속에 든 글도 배우는데 눈으로 보는 일을 못 배우겠나 하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