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미구등신

이쁜준서 2014. 9. 3. 22:58

 

준서할미가 어찌 보면 좀 히프다.

내것이라고 차곡차곡 챙기지 못하고, 잘 나눈다.

나눈다는 것을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하게 되지만, 어찌 나만이 늘 나누는 입장이겠는가?

준서할미도 나눔을 받고, 또 나누고 그렇게 사는 것이다.

단지 나누지 않아도 될 것도 나누어 버리니 히픈 것이재.

 

 

 

준서에미가 도저히 퀠트 바느질을 할 시간이 없는데, 앉아 있는 잠시에도 바늘을 들고 손바느질을 해서 소품을 만든다.

좋아 하는 일은 시간이 있어 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만들어서 하게 됩니다라고 하면서.

아주 고운 천으로 만들어 두었던 직사각형 파우치 2개중에 하나를 고르라 하면서,

여행 가실 때 속옷을 넣으면 적당한 크기라 했다.

 

정말로 자투리 시간보다 더 작은 틈 사이 시간에 때론 바늘에 손가락도 찔리면서 만든 귀한 것을 얻은 것이다.

내 자식이 없는 시간에 바늘에 손 찔려 가면서 만드는 것이라 얻어도 쓰기 아깝고 굳이 얻고 싶지도 않은 맘이다.

 

서울역에서 사촌 언니를 만났는데, 언니가 본 것도 아니고, 언니에게 자랑도 하지 않았는데,

이야기 하다 일어 서서 배낭에서 찾아 내어, 

준서에미가 만들어 준 것인데, 언니 여행 갈 때 쓰라면서 언니를 주었다.

나는 또 얻으면 된다고 말하면서.

실상 준서에미가 얼마나 힘들게 만드는지를 알기에 누구 주었다는 말도 못하고 다시 하나 만들어 달란 말도 하지도 않을 것이면서,

 

사촌 언니는 아들만 둘이어서 딸 같았던 아들은 결혼을 하고 분가를 했으니 1년에 이름 있는 날에만 보고,

큰 아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같이 살고 있고,

일흔에 몇살 더한 나이의 모습도 안타깝게 보이고, 정겹게 맘을 나눌 딸 자식도 없고, 쓸쓸해 보일적이 많았다.

딸에게 얻어서 사촌동생이 준 것이라, 여행을 가면서 그  파우치에 챙겨 넣으면서 기분 좋으라고 주고 싶었다.

 

 

 

1970년대 섬유산업이 어려운 시기이고, 섬유공장은 규모가 작고, 일 거리가 없어서 히마( 언제 다시 가동 될지 모르는 상태)가 져서

대전으로 갔다가 1년여 다니다 보니 그 공장도 히마가 져서 시동생 가족이, 끝내 집으로 이사를 와 우리와 합가를 해서 산 적도 있다.

우리 아이들 보러 1년에 딱 한번, 하룻 밤 주무시고 가시던 친정 엄니 오시니,

4살 아기 2명, 7살, 8살  어린아이 4명이 방에서도 마당처럼 뛰어 놀고,  식구는 많아져 있고,

 

왜 이러고 사느냐?

 

힘들 때 형제가 필요하지요.

우리 식구가 얹혀 사는 것이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내가 느그 집에 오면 맘의 죄 짓게 된다시면서,

미구등신이라 하시고 가시고는 돌아 가실 때까지 오시지 않으셨다.

 

준서할미는 어찌보면 지금도 미구등신인지 모른다.

 

 

 

오늘은 멀리 있고, 한번도 만나서 인사를 나눈 적도 없는 분께서 햅쌀을 보내 주셨습니다.

직접 농사 지으신 것이라 너무도 귀한 쌀입니다.

올 같이 일기 고르지 못한 때, 추석이 일찍 들어 벼이삭 익기에는 하루 햇빛도 아쉬운 때에 늦장마에 계속 비가 오고,

이 쌀이 되기까지에, 하늘에도 감사한 맘이고, 어떤 맘으로 농사 지으신 것인줄 알기에

준서할미 맘과 등이 훈훈해 졌습니다.

 

이 쌀도 너무도 귀한 햅쌀이어서 혼자 먹을 수 없어 이웃의 친구와 나눌 것입니다.

 

보내 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