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전라도 선암사 경내에서
예전 초등학교 고학년 때 아버지 고향으로 전학을 갔었더니,
나는 부산에서 살다 갔으니, 그 당시 베신이라고 불렀던 흰색 운동화를 신고 갔었는데, 아이들은 다 고무신을 신고 있었고,
남자 아이들은 남자 검정 고무신을 신었고, 여자이들도 코 고무신을 신은 아이가 있긴 했지만, 남자 고무신과 다름이 없는
검정고무신이였다.
4월에 전학을 가니 운동장이 아주 넓었고, 운동장에는 아름드리 겹벗꽃나무가 있었고, 한 켠으로는 실습지라면서 채전 밭이 있었다.
나중 가을에 알게 된 것이지만, 학교 앞 신작로(국도) 를 건너면 학교 실습지인 논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국민학교여서, 판자로 벽이 된 그런 교실이었는데, 내가 4학년으로 전학을 갔을 때까지
4학년까지 오전 오후반이 있었다.
미리 전학서류 가지고 갔다가 어느 날 오라고 한 날 십여리 길 걸어서 학교에 갔더니 그 때서야 오후반이라고 했고,
십여리길이 얼마나 먼지 몰라서 집으로 타박타박 왔더니, 오후 반이 시작 되고 아이가 들어 오지 않으니,
전학 온 첫날 오전반 시간에 맞추어 왔던 아이의 조재는 알아야 했기에,
같은 반이였던 우리 오촌아재를 아에 가방을 싸서 우리 집으로 보내기도 했었다.
그 때 그 시절 검정고무신은 논 물꼬에서 몰려 있는- 몰려 있다해 보았자.
대여섯마리 미꾸라지를 신발 한 짝을 벗어 담아서,집으로 가지고 오기도 했고, 가을 벼을 수확하고 비가 와서
논에 물이 차고 몇일 뒤이면 흙이 갈아 앉아 논 바닥에 논고디(논우렁이)가 파고 들어 간 자국을 보고 논고디를 잡아서
또 검정고무신 한짝 벗어서 담아 오기도 했었다.
고향은 시골 집들이라도 서쪽 사랑채 옆이거나 북쪽 뒤란에 집집마다 대밭이 있고, 흙과 돌을 섞어서 만든 담을 치고,
사립문은 싸리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북 쪽 담에는 개구멍 같은 것이 있고, 큰비가 내리면 그 개구멍으로 냇물처럼 물이 흘러 들어 와 또 남쪽 담의 개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얼마나 좋았던지.
싸리나무로 만들어진 사립문이 있었고, 그 사립문 밖에는 담 밑으로 양쪽에 채전 밭이 있고,
한쪽에는 단감나무가 2개 있었고, 참감나무는 마당에 3그루 있었다.
사립문이란 것은 경계이었던 것 같다.
사립문을 여는 것은 하루의 시작이고, 밤 늦게 닫는 것은 하루의 마감이기도 했고,
사립문 안에 있는 집과, 옛 노래말처럼 울도 담도 없는 집이 되지 않는 그런 경계가 되기도 하는.
감나무는 연해서 자칫 발을 잘 못 디디면 부러 지는데, 초등학교 어린아이인 나는 감나무에 올라가면 벌레가 먹어
홍시가 된 감들이 있어 몸 무게가 얼마 되지 않고, 겁도 없어서 제법 가지 끝까지 발을 디딛고, 감 따는 장대로 홍시가 달린
가지를 꺾어서 홍시를 땄다.
지금에 생각하면 참 위험한 일이였는데, 홍시가 땅에 떨어지면 터져서 먹지 못하니,
그 달콤한 홍시의 맛에 간식 귀한 그 시절에 어찌 나무에 올라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 때 실력이? 남아 있어서 지금도 옥상에서 옥탑을 오를 때 의자 하나로서는 모자라서 철봉하듯이 몸의 반동으로
몸을 걸치고 올라 갈 수 있다.
우리 동네에는 흙과 돌을 섞은 흙담이었고, 돌담이 없었다.
그런데도, 돌담이 TV속에 보여지면, 향수에 젖어 든다.
검정고무신을 보면 향수에 젖어 든다.
아직도 아버지 고향에는 작은어머니가 한 분 계시고, 주말에 가서 1박2일만 해도 사촌동생들이 울산에서 와 주지 싶은데,
정작 내게 그리운 이들은 가고 없을 것이니 그립기만 하다.
초등 고학년 3년을 뛰어 놀았던 산천도 다 변했고, 이제는 울산시 북구라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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