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래기 삶는 중
준서할미가 시골에서 산 것은 초등4학년부터 중학교 졸업 때까지였는데도
성장을 시골에서 줄곧 해 온 듯 합니다.
제 인생에서 그 시절이 저의 감성과 정서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요.
고등학교와 결혼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제2의 도시라는부산에 살았지요.
또 6.25전쟁으로 피난민이 모였다.
서울 수복과 전쟁이 끝나고도 피난민이 다 간 것도 아니고,
또 항구도시라서 이렇게 저렇게 없는 사람들이 장사를 마치고 살 한됫박을 종이봉지에 담은 것과
새끼에 구공탄 한장씩 끼어 놓은 것을 사가지고 산비탈 집으로 가도
그래도 어찌 어찌 하면 자식들 굶기지 않고, 또 어찌 어찌하면 자식들 공부도 시킬 수 있어 부산의 인구는 많았지요.
그 당시 부산이란 도시는 시골처럼, 음력정월 대보름이라고 찰밥에 갖가지 나무새를 갖추어 먹는 집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냥 찰밥에 일년내내 비루오르지 말라고 생선한가지, 쉬운대로 콩나물, 무나물, 해초한가지,묵나물 한가지이면
음력 대보름을 찾아 먹는 것이였지요.
묵나물도 씨래기 삶은 것뿐이기도 했습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사람들은 찰밥도 못 해 먹는 가정이 수두룩 했었습니다.
그리살다
경북으로 결혼을 해 와서는
시어머님도 경북 군위분이시고, 동네 시어머님 친구분들도 경북이 고향인 분들이시라
설 명절이 지나고 늘 음력으로 그 달의 초사흘날에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께 기도 드리러 가시던 분들이시라
음력 새달 초하루만 되면 가시기 전 공들 들인다고 멸치라도 들어간 음식, 김치도 젖갈김치는 않된다고
젖갈 없이 찹쌀풀에 양념한 맨김치를 담아놓고 그 김치를 잡수시다.
초 사흘 아침에는 목욕탕은 이미 음력 섣달 그믐께 다녀 오셨으니
정지간에서 찬물 한바가지 덮어 쓰고는 팔공산 갓바위부처님께 다녀 오셨지요.
오늘처럼 찬 물이 곧 얼음이 되는 혹한이었어도.
또 음력 정월보름날에는 간소하게 건어, 밤, 대추, 사과 , 배, 떡, 술,
초, 쌀을 준비해서는 용왕미기러 간다시면서
강가를 찾아가셔서는 공들 들이고
각 가족 당 한장씩의 한지를 태우면서 그 해 액을 막아달라는 비는 말과 함께 소지 태웠지요
손이 곱아서 소지종이를 접기도 힘든 추운 날씨였습니다.
아직도 용왕미긴다는 말을 용왕님께 액을 막고 복을 달라는 공들이는 맘 정도로만 이해 합니다.
어머니도 일찍 기독교를 믿으셨고,
이모님들, 외삼촌 부산에 나와 계셨던 어머니 형제분들이 다 기독교를 믿었기에
결혼해서 처음으로 보는 것이였고,
또 결혼해서 처음으로 무당집에도 가 보았지요.
시어머님도 정리 하신지가 15년정도 지났고,
준서할미는 대를 받지 않아서
다 지나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정월 대보름이라는 것이
갖가지 나무새 갖추고, 갖가지 곡식으로 찰밥을 짓고
그렇게 먹는 것만 하는 요즘과는 많이 달랐던 정월 대보름이었습니다.
사는 모습으로 맞고 틀리고는 논할바가 아닌 지난 간 시절의 일이지만,
그 섣달 그믐께, 정월 초순에
더운물도 아닌 찬물을 덮어 쓰고,
팔공산 갓바위 오르는 계단도 얼음이 있는 빙판이고,
지금처럼 좋은 등산화를 신지도 못했고,
운동화보다는 플라스틱 신발이 덜 미끄럽다고 그 신발을 신으시고,
신에 새끼를 둘둘 감고서 그 많은 계단을 오르셔서
갓바위부처님 앞에서는 그 칼바람에도 108배를 올리셨던
우리 엄니세대분들의 자식사랑에는
준서할미 세대는 너무 편해서 그 정신을 다 이어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씨래기를 삶고, 묵나물을 삶고,
몇가지 나무새 갖추고
비린내 덜 나게 생선찌개도 준비하고,
부럼도 준비하고
갖가지 콩류와 팥을 삶아
찰밥을 할겁니다.
오늘 오전, 오후 씨래기를 두번 삶았습니다.
오전에 삶은 것은 조금 질긴듯해서 껍데기를 까서 우려서
냉동고의 청양고추 넣고, 된장 넣고 끓였더니
속이 편안하고 씹을 것 있는 오랫만에 입에 맞은 저녁을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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