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1950 년대의 도시의 다리밑....

이쁜준서 2009. 1. 5. 00:10

 

 

 

1950년대에는 육이오 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부산에는 거지가 많았다.

너 나 할것 없이 밥을 배불리 먹지 못하면서도,  하루 중 아침에는 밥을 얻으러 오는 거지에게 밥을 주었다.

동냥도 식전에는 얻기가 어렵고, 또 식후가 되면 다 먹고 없다고 하고, 식사 시간에 가면 먹던 밥을 덜어서 주기에 시간을 잘 맞추어야 밥을 많이 얻을 수 있다.

본인이 먹으면서 배고파 밥 달라는 사람을 외면하기는 쉽지 않았던 인정이 있던 세월이었다.

 

우리도 그 때 그 시절 형편으로 살았는데, 이모님댁과는 가깝게 살았다.

이모님은 일본에서 결혼을 하셔서 히로시마 원폭으로 정신이 나간 이모부님을 모시고 한국으로 나와 남편이 돌아가신  분이셨다.

육이오 때는 울산고아원에서 생활을 하셨던 분이셨고, 그 당시에는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독립을 해야해서 갈데가 없는 고아들이

부산으로 와 직장을 구할 때까지 이모님댁에서 기거를 했다.

혼자 살면서 넉넉하지 않은 집에 고아원에서 온 아이들이 있을 때가 많고, 그 중에는 시장에나 구멍가게에서 좀 도둑질을 해

이모님이 물어 주시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서커스단에서 도망 나온 사람을 숨겨 두었다가  그 사람들에게 혼줄이 나시기도 한 적도 있었다.

서커스단의 사람이 하필이면 이모님댁으로 어떻게 숨어들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어느날 이모님이 일곱살 여자아이가 몇일간 밥을 얻으러 오는 것을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냐고 물었고,(계시지 않다는 대답을)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더니 다리 밑에 산다는 말을 들으시고, 몸을 깨끗하게 씻기고,옷은 가까이 사는 같은 일곱살인 준서할미 옷을 갖다 입히고는 

집안에 숨겨 두셨다.

그랬더니 그들의 다리 밑 소굴에서 몇날 몇일을 찾다가 이모님댁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자기들이 부모라고 우기니 어쩔 수 없이 보내게 되었다.

 

보내 놓고 이모님이 그 아이를 잊을 수가 없어, 우리 엄마와 일곱살의 준서할미도 함께 데리고 다리 밑으로 찾아 갔었다.

먹을 것을 준비해서 갔었다.

지금까지 눈에 선한것은 아주 깨끗한 그곳 풍경과  가마니로 가리개를 한 칸막이가 몇개 있었던 것과, 다시 거지여자아이가 된 그 아이였다.

얻은 밥이나, 넝마주이한 돈이나 다 공동으로 관리되고, 대장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내가 다 커서 알게 되었다.

 

그 시절 부산에서 살았기에, 다리 밑이라면 어느 다리 밑이라도 거지들의 집이 있었다.

처녀적까지는 다리가 건너다 보이는 길을 지나칠 때는 언제나 다리 밑에 사람이 살고 있을 까? 하고 보기도 했었다.

이모님이  남 다르셔서 다리 밑 거지굴에도 가 보았었고, 우리가 가지고 간 먹거리였지만, 대접을 받고 오기도 했었다.

참으로 오래된 이야기이다.

 

'샘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국이 감기가 강타한셈....  (0) 2009.01.16
연예프로그램을 보고...  (0) 2009.01.06
2009년의 다짐  (0) 2009.01.01
내가 준서를 기다리나...?  (0) 2008.12.30
건멸치  (0) 2008.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