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단위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사진
앞줄에는 바지에 코고무신을 신은 동무도, 왼쪽의 쉐타를 입은 동무는 부잣집 딸이였고,
뒷줄에는 베신이라는 그 당시 운동화를 신고 있기도 하고,
명절이면 새로 천을 끊어다 한복을 해 주셨던 시절이였다.
한복은 통치마였고, 그 당시 스타킹이나 타이즈가 없던 시절이라 내복바지 위에 치마를 입었다.
학교에 오면서도 통치마, 저고리를 평상에도 입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기암할 일이였다.
이젠 길에서 만나도 못 알아 볼 동무들입니다.
울산에서( 군단위)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쳤고,
- 그 때는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입학시험이 있었다.
합격을 했고, 입학금과 납입금, 교과서 대금까지 그 때 모든 가정에서는 큰 부담이였기에,
봄 춘추복을 입고 다니기까지
사복차림으로 다녔고, 교복은 봄 춘추복부터 입었다.
후리아인 치마를 입었고, 흰색 긴팔 포프린천으로 상의를 해 입었을 때는 교복 맞춤집에서
맟추었기에 색도 똑 같은 교복이었다.
그러다 가을 들어서 동복을 입기 전 동복 교복도 교복 맞춤집에서 맞추었는데,
가정 형편에 따라서 상의만 맞추고
구제품 시장으로 가서 염색을 한 사지 바지를 사 와서 구제품 시장 맞춤점에서
바지를 만들어 입으면 더 헐하게 치였으니,
바지와 윗도리 색이 다르기도 했다.
고2 때 봄 소풍때
그러나 그 때는 부산이란 특수한 지역이어서 그런 학생이 많아서 그리 부끄러운 일은 아니였다.
구제품 시장은 부산 국제시장쪽에도 있었고, 그 구제품 시장에서 사온 옷을 다림질하고,
조금 떨어진 곳은 짜집기로 구멍을 메꾸고,
남자 옷들은 부산 범일동에 구제품을 파는 상가가 있기도 했다.
지금으로 치면 체크무늬의 콤비로 맞추어 입을 수도 있었으니,
천이 다양하고 모직제품이 많아 말이 구제품이지 멋장이들이 찾아 입기도 했다.
초등1학년 때인데 구제품 옷이였다.
그런 구제품 팔고 사고 하는 장사는 60년도 말까지도 부산에는 있었다.
여자옷은 아침에 구제품 시장에서 하나라도 좋은 옷을 갈리려고 난장판으로 옷을 사 와서 엔간한 것은 뜯어서 구제품 시장 전문 맟춤집에서
만들어 여자 옷을 다시 만들기나 수선을 해서 팔았는데, 그 천이나 색상이 그 당시 우리 직물보다 월등하게 좋은 것들이 많아서.
멋쟁이 아가씨들이 그 구제품 상가를 많이 찾기도 했고, 구제품 중에 구두도 있었는데 그 구두는 없어서 못 파는 물건이기도 했다.
섬유산업이 발달하고, 염색기술이 늘어나고는
작은 양장 맞춤점이 생기고, 그 중에서도 잘 한다고 소문이 난 양장 맞춤점이 생기고,
그러면서 시장에서 제품을 만들어 도매를 하게 되었고,
우리들의 의생활은 발달이 빨라 졌다.
준서할미 아가씨적 때 울산 방어진에 친구들과 놀러 가서인데,
모직 카키색 맥시코트이고, 서울에서도 잘 한다는 양장 맞춤점에서 서울 작은아버지댁에 가
바지와 한벌로 얻어 입은 옷이다.
겨울바닷가라 바람이 불어서 스카프를 머리에 둘러 쓴 모습이다.
이 때도 구제품 옷을 파는 상가가 있었어도,
헐하게 입으려고, 아니면 천도 디자인도 달라서 멋장이로 입어 볼려고 찾기는 했지만,
구제품 상가가 빛을 잃어 가던 때이다.
경기가 나빠지고 책이 덜 팔리고,
우리 도시에서 큰 서점들이 있던 거리에 책방이 구제품 옷 상회로 변해 있다.
처녀적은 구제품 옷을 입기도 했는데도 책방이 그렇게 변한 것이 서글퍼져서 한번도 직접 들어 간 적이 없다.
그런데 그 구제품은 우리나라 옷이라고들 했다.
예나 지금이나 구제품 장사는 파는 것이 돈이 되는것이 아니고, 아침 장에서 좋은 물건을 만나야 돈이 된다 했다.
지금은 헌옷들을 동남아로 수출을 한다고 한다.
헌옷이라도 요즘 옷은 헐어서 떨어진 옷은 아니니 동남아에서도 인기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50년대, 60년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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