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30일 분갈이 2018.6.21일 20여일 살음하고 자람
카라는 몸값이 좀 나가서 살음을 못하고 가버리면
더 아까운 식물이다.
내년은 생각하니 분갈이를 하지 않을 수 없어 5월 30일 더운 날씨인데도
분갈이를 해서 나무와 나무 사이에 놓았다.
해가 돌아서 나가니 반음지인 셈인데, 바람은 무시로 드나드는 곳이였다.
왼쪽 사진의 카라는 빳빳하고 당차게 보인다면,
오른쪽 사진의 카라는 늘씬늘씬 한데 여리게 보인다.
이제 햇빛을 받는 자리로 옯겨야 하고,
그렇다고 햇빛을 하루 종일 받아서는 잎에 화상을 입는다.
몇 몇 화분들을 아침에 자리 배치 다시 해 주었다.
화분에서 이 정도로 기세 좋게 자란 것만해도 성공이다.
카라는 좀 까다로운 식물이다.
준서할미가 어린시절에는 자기 집에서 시어머니란 호칭을 단 노인 시어머니도 자기 며느리( 손부의 시어머니)에게는
기세가 대단 하셨지요.
비록 연세가 너무 많아서 안방을 며느리에게 넘겨 주고 머릿방이라고 대청 옆에 있는 방으로 물러 앉으셔도,
자기 며느리에게는 말발이 섰습니다.
머리가 허옇게( 그 당시는 염색약도 없던 시절) 같이 늙어 가는 며느리는 밤에는 잠자리 펴 드리고, 아침이면
잠자리 거두어서 놓고, 겨울이면 따뜻한 세숫물을 대야에 담아 방으로 들여 드리고,
겨울이면 아침 밥을 지어 먹고 설겆이 까지 마친 아궁이에서 화로를 들고 가서 얼마간 재를 들어내고,
새 불을 담아서 시어머님 방에 드리고, 시어머님이 장수하시고 가시면,좋은 세월 다 가고,
저승길만 보인다고 신세 한탄을 하셨지요.
물론 그렇게 시어머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니 자기 며느리에게도 불호령을 할 수 있었고,
안방을 차지하고, 안주인 자격으로 씨앗을 뿌리는 권위가 있었지요.
그러시다 돌아 가시면 며느리가 안방을 차지 하고, 씨앗 뿌리는 일도 물려 받아 하게 됩니다.
어디든 가서도 당당한 안 주인은 안방 차지가 아니라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안방 차지야 당연히 따라 온 것이였지요.
우리 큰어머니는 결혼해서 일본으로 남편의 3형제가 돈벌러 가실 때까지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합니다.
중간에 한번 나왔다 가시고, 아들아이를 낳았고, 해방이 되어 일본에서 결혼한 시동생들은 한국으로 나왔지요.
그곳에서 일본여자와 함께 사셨던 큰아버지는 나오시지 않았고, 어린 아들 하나 의지하고,
철 없는 막내 시동생과 함께 시골살이를 여전히 하고 계셨습니다.
남편이 없어도 시골 집에서 시부모님 제사도 모시고, 도시로 나간 시동생들의 본가 노릇을 다 하셨고,
큰 시동생은 살림 살이의 뒤를 보아 주셨습니다.
준서할미가 어린 시절까지도 장가를 가서 처갓댁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묵혀서 온다는 풍습이 있었고,
신부는 친정에서 1년여 지내다 날을 받아 시집으로 오는데, 그 날이 신랑쪽의 잔치 날이였지요.
시집으로 와서 친정에서 언제쯤 친정으로 보내 달라 하는 편지를 보내면 그 날에 맞추어서 간단한 음식을
해서 첫 친정나드리를 했었지요.
예로부터 시어머니 시집살이는 얼개 빗이면 동서 시집살이는 참빗이라 했습니다.
셋째 숙모는 그 얼마간 있는 날 중에도 새신랑 남편은 전방에 군인으로 있으니 혼자서 지냈다 합니다.
날도 덜 샜는데 동서는 담뱃대를 화로에 두들리기 시작하고 그 소리에 일어 나지 않으면 점점 소리는 크지고,
그런 시집살이가 너무 싫어서 친정에서 언제 보내달라는 편지가 온것을 더 빠른 날자로 고쳤다 했습니다.
큰동서는 다행히 글자를 못 읽어서 그럴 수 있었다 했지요.
막내 시동생이 장가를 가고, 1년여 뒤에 동서가 왔고, 한 집에서 사랑방에 시동생네가 살고,
안채 큰방에서는 큰어머니가 기거를 하셨지요.
시골에서 자라온 새댁은 달리 방도도 없고, 동서 시집살이 2년여 살고서야 살림을 낫다 합니다.
큰어머니가 그렇게 인정사정 없는 사람이 된 것에는 남편처럼 믿고 사는 7살 아이를,
동네 사람들이 소를 몰고 소 풀 뜯기러 산으로 가는데, 20여살은 되었을 시동생이 형수 장에서 올 때
맛난거 사오면 너 다주께하고 자기는 집에 있고, 그 7살 아기를 동네 사람들을 따라 보냈는데,
산에서 늑대를 만났고, 7살 아기가 넘어졌고, 늑대는 덥쳤고, 아기를 놓치신 후 삶이란 여유가 있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 당시는 20살이라면 농사 일에 큰 일군인 나이인데 라디오가 있는 것도 아니였는데, 그저 낮잠을 잘 뿐이였는데
왜 그랬을까요?
막내 시동생은 살림을 낫어도 자기 농토를 준 것이 아니라서 일철에는 농사도 같이 짓고, 아침 밥만 자기들끼리 먹고
낮부터 저녁밥까지는 동서네로 와서 같이 지냈으니 시집살이를 많이도 하셨습니다.
큰어머니는 환갑도 되시기 전에 가시고, 막내 숙모가 집으로 들어 와 안방차지도 하고, 씨앗도 뿌리셨지요.
씨앗을 뿌릴 수 있다는 것은 그 시절 농가에서는 대단한 힘이였습니다.
동네에서 그 또래 중에서 제일 먼저 씨앗을 뿌렸습니다.
처음 씨앗을 뿌리는 날, 남들은 씨앗을 한 주먹 쥐고 훌훌 뿌려도 고루고루 흩어지는데( 보리씨앗) 한 곳으로 몰리고
첫 씨앗을 뿌리니 사람들은 구경하면서 웃고 했던 것을 어린 시절 저도 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 현대는 농사 방법이 바꾸어져서 씨앗을 뿌리고 관리 하는 일이 그리 중하지도 않을 겁니다.
농촌에서도 모를 사서 모내기는 또 기계 모로 하니 정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그 시절로 집안의 기본은 안주인이였고, 현대인 지금도 안주인이 집안의 기본인 것은 같다 싶습니다.
우리 자식들이 준서할미와는 멀리 살기에 자주 만나지도 못하지만, 세상살이를 기본은 친정 엄마인 저에게
기본을 두고 있습니다.
아기 하늘이 에미가 첫돐은 날자 전에 하는 것은 괜찮지요?
연락도 하지 않고, 와서 1박을 하고 갈 때 급하게 오이 장아지 담아서 넣고, 쌈장 만들어서 김치냉장고에서
숙성 되어 있던 것 반찬통에 담아 주었습니다.
언니가 와서 오이장아지 조금 담아 주었고, 주말에 형부하고 준서까지 와서 저녁 먹기로 했다면서
그 때 먹을 것 남아 있어요라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친정엄니가 그 아이들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지요.
저가 어린 시절 못자리는 아버지나 할아버지들이 하셨고, 보리나 콩, 등등의 씨앗과 모종은 엄니나 할머니들이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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