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나의 시어머님

이쁜준서 2007. 3. 10. 02:33

 

나의 시어머님은 올 해 일흔 아흔홉이신 분이시다.

시어머님이 마흔 다섯이실 때 나를 며느리로 맞이 하시고 지금 껏 싫은 소리 한 번 하시지 않고 지내신

후덕하신 분이시다.

열 다섯에 민며느리로 시집을 가셨다 하셨다.

그 마을에서(경북 군위지방) 술 주막을 하는 전라도 시어머니가 있는 집에 시집을 가셨다고 한다.

술을 한다고 꼬두밥을 지어 누룩과 섞어 뒤란에 늘어 놓으면 누룩이 있어도 배가 고파서 누룩을 후후

불면서 먹었다 시어머님께 머리 지어 박히기도 숱하게 많이 하시고, 키가 작아서 밭 솥인 가마솥을

씻을 수 없어서 부뚜막에 올라가서 씻었다고 하셨다.

신랑이 가까이 올까봐 젖가슴을 꽁꽁 묶어서 한쪽에 자기도 많이 했다면서 신랑은 군대에 가고

육이오로 해산달에 피난을 가셨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키우던 개가 살아서 동네 밖까지 나와 있어

반가웠다고 하셨다.

퇴로하는 북한군이 소도, 개도 잡아 먹던 시절이었었는데. 

고부간에 앉으면 옛이야기, 지금은 막내집에 계신데 손녀들 이야기, 경노당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밤 늦도록 이야기를 한다.

 

막내 시동생이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다.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그런 행동을 해도 본심으로는 그러지 않을테고, 귀신이 집혀서 그랬을

것이라고, 팔공산에 그리도 열심히 공들이러 가시고, 굿도 하시고 그려셨다.

이제는 그 막내집에 큰아이 출산 때 가셔서 일 나가는 며느리라 아기들 키워주시고, 살림해 주신다고

그 곳에 계신다.

이제는 연세가 드시고, 작년에 무릎 관절 수술을 하셔서 제사 때 말고는 못 오신다.

우리네의 역사의 근대를 사신 분이시다.

첫 남편을 육이오 전쟁으로 여위었고, 그 곳에서 낳은 딸 하나는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해서 살고,

첫 외손녀를 지에비한테 떼어 주면서 홧병을 얻으셨고, 대기업에 과장으로 있는 아들과 대학에 강사로

나가는 며느리와 뒷수발을 하는 손녀 두명을 거느리시고 사신다.

근대에서부터 현대까지의 우리네 이야기를 다 가지고 사신 분이시다.

 

원래 시어머님이 남편 중2때 돌아 가시고, 그 때 재혼한 시어머님이시다.

내가 시집 갈 때는 또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시어머님이 5남매를 거느리고 사시고 계셨다.

그래서도 우리 가정은 시어머님께서 후덕하셔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분의 속은 용광로였으니까 말이다.

전생의 인연인지 몰라도 지금도 나는 시어머님이 좋다.

내가 더 나이가 들면 그 후덕함 정도가 될까?

 

내가 이 나이가 되어도 아무 음식이나 잘 먹는 사람이 아닌데. 시집와서는 반찬이 맞질 않아서 밥을 잘 먹지 않으니 내가 잘 먹는 반찬이 있으면 시어머님이 잡수시질 않으셧다.

그것을 눈치 채고는 내가 빨리 숟가락을 놓으면 며느리 한 끼니 더 주겠다고 그 반찬을 남겨 두었다

주셨다.

정말로 사랑하는 분이시다.

 

(준서가 폰으로 찍은 사랑하는 시어머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