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친구와 친족

이쁜준서 2017. 11. 6. 01:32

 

 

오늘 받은 카톡

 

"사랑해 나의 친구"

남편이 풍으로 고생하시는 것이 중증이라 그 수발을 하고 살아가는 친구의 카톡이다.

 

" ...... 요즘 늘 피곤해서 눈도 제대로 못 뜬다 했는데, 오늘 오랫만에 피곤 한 줄 모르고 지냈네요....."

오늘 울산에 갔다가 만나서 울산 동천강을 끼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걸었던 민서할머니 카톡이다.

정말 고단하게  보였는데, 만난 반가움으로 그것도 한참을 걸었는데 도리혀 피곤 한줄 모르고 지냈네요라고.

 

친구란 그런 것이다.

친구의  한 마디가 위로가 되고,

친구와 오랫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듯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면서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결혼식 참석차 울산으로 가면서 운동화를 준비해 갔다.

운동화 한 켤래가 넣고 짚으로 닫으니 작은 핸드백처럼 크기의 천 가방에,

모자도 접어서 넣었다.

 

 

 

 

 

 

울산 동천강

방천둑과 강 바닥과는 높지 않았고,

이 사진에서 풀밭으로 보이는 것은 큰비가 와서 강물이 범람할 때 물이 내려가는 물길일 것이다.

왼쪽으로 깊게 보이는 곳으로 물이 흘러 가고 있다.

이 사진은 걷기 시작할 때 들입이다.

 

 

 

 

 

걷다 보면 물길은 몇번이고 바꾸어 졌다.

물이 너무도 맑았다.

하늘은 쾌청했고, 물은 맑았고, 공기가 더 없이 맑았다.

요즘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아주 아주 큰 선물 같은 날이였다.

 

강물을 바라보면서 도란 도란 이야기 하면서 걸었다.

 

 

 

 

상류쪽으로 오니 보가 만들어져 있었다.

남부의 봄부터 벼를 추수하는 늦가을인 지금까지

가뭄의 긴 긴 기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발원지를 거쳐서 내려오는 물의 양이 많다.

 

강이라 부르고, 하천이라 부르는 것은 유량으로

물이 많으면 강(江), 물이 적으면 천(川) 이라 대부분 그렇게 불러도

천(川) 이라 불러도 강(江)이라 불리우는 곳보다 평소 흘러 내리는 물이 많은 곳도 있기는 하다.

삽교천이 그러하다고 한다.

 

 

 

저 멀리 보이는 곳은 호계란 곳이고,

올 때 걸어서 오다가 예매 해 간 기차표 시각이 한 시간 정도 남아서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싶어서,

버스를 탔지만, 호계역에서 기차를 타고 왔다.

많이 걸었다.

 

 

호계는 내가 어린시절 아버지 고향에서 살 때 십여리 길을 걸어서 다녔고 졸업했던

농소국민학교가 있는 곳이다.

 

예전 시골 5일장이야 규모 면에서야 그리 크지 않았지만,

소시장도 형성 되었고,

나뭇짐을 파는 곳도 형성 되었고,

입구 쪽에는 가마솥을 걸어 놓고, 소고기 국을 끓여 팔았고,

나뭇짐을 지고 온 남정네,

소를 파거나 산 남정네,

쇠고기 국밥집 삐가리 복통만한 방은 담배연기로 자욱 했다.

 

오전반을 마치고 장으로 들어 가면서 자욱한 방 안을 살핀다.

우리 중에 누구의 아버지가 계셔도,

우리는 그 맛나는 장터 쇠고기 국밥을  각자 한 그릇은 아니어도

양푼에 담아 주면 여럿이 같이 퍼 먹을 수 있어서.

 

 

학교 교실이 적어서 4학년까지는 오전 오후반을 하고 있어서

오후반이라 해도 오전반 아이들이 일찍 아침밥을 먹고 갔다면,

오후반 아이들은 늦은 아침밥을 먹고 출발 하기에

등교길은 소풍길이 되어서

논둑으로 들어서서 논고등도 잡아  동해남부선 철로에 얹어 놓고 돌로 때려서 까 먹기도 하고,

아침에 주웠던 감꽃을 가지고 가면서 먹기도 하고,

햇찔레 순을 꺾어  먹기도 하고

 

5일장날은 학교 가기 전에 장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장으로 들면 우리에 갇힌 소들이 슬퍼 보였다.

송아지들은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그 시절은 그렇게 커 보였던 호계장은

지금은 양쪽 인도까지가 장터가 되어 있었다.

5일장 장꾼들 사이에서는 호계장은 장사가 잘 되는 곳이라 했다.

그럴 것이다. 주변에 저렇게 아파트 촌이 많으니.

 

행정명으로는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에는

울산군에 속했다.

그러다 울산이 공단이 되면서 시로 울산시와 울주군으로 나누어 지면서

울주군에 속했는데,

지금은 울산시 북구로 편성 되어 있는 곳이

어린 시절의 온갖 낭만이 깃든 고향 땅이다.

 

 

 

 

60대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결혼식에서 평소 만나지도 않던 아버지 형제분들의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들, 큰엄마, 작은엄마를 만나면

반가워서 인사를 해도 그냥 그랬다.

 

60대 후반이 되니 나이차가 많은 고향의 사촌동생들이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러 오니 그 동생들이  그렇게 고마웠다.

큰 아이 때는 큰엄마, 작은엄마들이 오셨고, 사촌들도 몇 몇 사람이 왔다.

4년전 둘째아이 결혼식에는 서울의 작은엄마만 오시고, 큰엄마, 작은엄마 두분께서는 건강이 출입을 하실 형편이 못 되었다.

더 어른스러워 진 고향의 사촌 3남매가 왔었다.

나이차가 많은 동생들이 와 주어서 참으로 고마웠다.

 

이제 노년에 갓 들어선 어제 결혼식에서 만난 혼주인 큰여동생은 믿음직 했고,

맏이인 정년이 2년 남았다는 남동생은 더 더욱 믿음직 했고,

둘째 여동생은 본시 이뻤던 아이였는데 한복을 입었는데 아름다웠다.

 

밀고 다니는 것이 없으면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 자기들 엄마를 외손녀딸의 결혼식에 고향으로 가서 모시고 왔다.

그 정도 연세이고 그렇게 불편한 몸으로 대부분의 자식들은 결혼식에 모시고 나오지 않는다.

혼자 남으신 어머니께 4남매 자식들이 다 잘하는 듯 보여서 좋았다.

작은엄마는 자꾸 자꾸 눈물을 찍어 내셨다.

작은엄마도  서울의 작은엄마를 보시면서 또 나를 보시면서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으셨을 것이다.

작은엄마 눈물 보고 있으면 나도 눈물 보일 것 같아서 서둘러 나와 버렸다.

친척아지매들 안부를 여쭤 보았더니 놀랍게도 100세를 넘기고 사시는 분도, 90대 아지매들도 몇분 계신다고 했다.

내 어릴 적 고향 친척아지매들의 안부는 봄 날 아지랭이 멀리서 피어 오르는 그런 아련함이었다.

 

 

 

 

 

 

그 아재가 중학생인가? 고등학생인가? 였고, 내가 국민학교 고학년인 시절에,  그 아재는 내게 참으로 잘 해 주었다.

그 아재는 경주까지 기차를 타고 통학을 했다.

기차역까지는 5리 길이였고, 철로 주변은 야산이었다.

봄철 학교 갔다 돌아 오는 길 야산으로 들어가 빈도시락에 산딸기 가득 따서 담아  나를 불러서 자기 집에서 먹고 가라고 했다.

바로 담을 두고 붙어 있던 친척집이였는데, 그 댁 할머니도, 처녀 고모도 먹는 것도 챙겨 주시고 참 잘 해 주셨다.

그 아재가 문득 문득 생각날 때는 언제고 식사한번 대접해야 겠다 하면서도 내가 참석하는 친정 쪽 결혼식에서는 만나지 못했고,

장례식에서도 딱 한번 마주쳤을 뿐이었다.

어제는 안부를 물었더니 몇일 전에 세상 하직 했다고,

그렇게 술을 마셨으니 술병이지... 라고,

맘이 쨘 했다.

면 단위의 곳에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울산 군의 사무소가 있는 곳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는 그 아재가  학교로 한번 찾아 왔다.

와서 지금으로 보면 한 5천원 정도의 가치가 있는 용돈도 주고 가셨다.( 그 때 그 아재 나이도 고등학교를 마친 그 나이 쯤이였다)

그 아재와 꼭 만날려고 나섰다면 만날 수도 있었던 것인데 내가 너무 무심했다.

그 분의 명복을 비는 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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