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사람들이 다 같은 성씨이니, 눈은 멀어졌고 그래도 아들 자식이 없어서 딸은 시집살이로 멀리 있고,
혼자 사셨다.
우리집은 아버지대 큰어머니셨고, 할아버님 형제 댁이 세 집이 있었기에 수시로 서로 서로 나뭇단도 들여 들이고,
계절이 바뀌면 대 청소 비슷하게 해 드렸지만, 우리들 중 머슴애들은 들에 인가가 먼 곳에 홀로 있는 집 탓인가
돌을 던지고 돌 소리에 할머니가 봉당에 나오셔서 고함을 치시고 그랬었다.
그 집 손자가 우리들 중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이 든 고모뻘, 아재가 함께 살고 있지 않아서 어린아이들이
업수이 여겨서 그리 했을 것이다.
그랬지만 설명절 앞서서 동네 남자들이 모여서 소 한마리를 잡아서 몫으로 나누면, 보통은 한 몫을 했고,
명절이라고 모여 드는 사람이 적은 집은 반몫을 했고, 혼자 사시는 노인은 그 할머니 밖에 없으시니,
몫을 나눌 때 따로 맛나는 고기를 조금씩 떼어서 가져다 드렸다.
그 시절 소고기는 물론 한우 일소였고, 지금처럼 사료를 먹는 것도 아니었고, 쇠고기가 정말로 맛났다.
떡국 기미를 만들고, 산적거리도 하고, 탕거리도 따로 두고, 겨울 무 달고 맛나는 것, 겨울 대파 넣어서
작은 가마솥에 국을 끓이면 국은 붉은 기름이 동동뜨면서 국맛은 달고 깊었다.
그 시절은 한우 기름이라고 기피하지 않았고, 어쩌다 작은 기름덩이도 있어도 맛나게 먹었다.
이젠 한우 1등급이라 해도 사료를 먹고 자란 것이라 그 시절 쇠고기 국 맛은 나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 단골로 거래하던 정육점에 전철을 타고 갈 때는 맘 먹고 가는 것이라,
곰국 고와서 통에 담아 놓은 것 2~3통, 곰국에 넣을 사태 2~3근 사고, 양지 2~3근 사 온다.
마침 코로나 사태가 긴박하게 하기 전 2월 초에 양지 넉넉한 2근을 사다 둔 것이 있었다.
미역국을 끓인다면 4번은 넉넉하게 끓일 수 있을 것인데, 어제 냉장고에 한 덩이를 내어 놓았다.
아침에 칼질이 잘 들어갈 정도로 해동이 되어 있었고, 2/3 정도는 미역국거리고 썰고 1/3정도는 납작하게
썰고, 무 좀썰고, 육수 국물로는 북어 머리 1, 건표고 2, 다시마 한 조각을 넣고 육수를 내었다.
어제 멀리서 온 택배 박스에 봄동 실한 한포기가 있어서 데쳐서 쌈으로 오랫만에 싱싱한 채소를
실컨 먹고 남은 봄동 데친것과,옥상의 싱싱한 대파2 대궁이를 파채 칼로 손질하고,
TV에서 봄동 쇠고기 국을 끓이면서 약간의 된장 풀기에 된장을 망에 걸러 약간 된장기만 풍기고,
집간장, 액젓갈은 맛 도우미 정도로 넣고, 국을 끓였더니 아주 시원한 국이 되었다.
된장 맛이 풍기고, 봄동데친것이 들어 가 그냥 쇠고기 무국과 보다는 아주 시원했다.
콩나물이 없어서 못 넣었지만 콩나물 한 줌 넣어도 씹이는 맛과 시원한 맛을 돋우어 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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