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복 노인

이쁜준서 2024. 11. 7. 06:58

예전은 자식들을 많이 낳아서 친구들 중에는 형제들이 7남매나 8남매인 사람들도 있다.
시골에서는 사람이 많으면 일손이 많아서 좋다 하기도 했지만,
양식도 모자라고 복잡하기도 해서 5남매가 제일 적당하다고 했다.
5남매 자식을 낳아 길러서 결혼을 시키고, 손주들이 태어나고 그 부모들이 연세가 높아지면
그 시절은 부모를 공경하던 시절이라  그런 노인을 복노인이라 불렀고, 
그 시절은 수명이 짧던 시절이라 61세에 환갑잔치를 경제적인 살림 규모보다 거대하게 하기도 했다.
부모님 오래 사셨다고 자식들이 칠순잔치를 할 때에는 부조를 일절 받지 않고,
손님들을 대접하기도 했다.


 
지금이사 수명이 100세 시대라 하고 실제 100세를 넘기고도 건강하게 사시는 어르신들도 계시고
70대는 차라리 온갖 약을 병원에서 처방 받아 먹으면서도 친구들과 카페에서 수다수다를 떨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80대를 맞아야 노인 축에 끼이지 그 나름의 청춘이다.
주변에서 보면 만으로 80대에 들어서니 우선 전화시에 음성이 변하고,
몸이 꿈뜨고 식사량이 줄어들고 80대 후반이면 병원도 자식들이 모시고 가야 하고,
그러다 요양병원에 입소를 하고 그곳에서 다시 요양원으로 가게 된다.
그러다 저승을 가게 된다.
주변이 그러하니 70대 후반인 나도 내 나이가 무겁다.
 
치매란 병은 노인들이 제일 겁내는 것인데 나는 괜찮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가 없다.
건망증은 60대가 되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 올 해 89세인 친정 이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다가 걱정을 하면 걱정하지 말라.
우리 부모님도 우리 형제들도 누구도 치매는 겪지 않으셨다고.
치매도 일종의 유전병의 소질이 있는 병이라고.
그 말씀이 위안이 되는 것도 아닐만치 현실을 살아가는 노인들에게는 치명적인 병이다.


 
뒷집 형님은 올 해86세이신데, 늘 다리가 아프셔서 병원치료도 받으시고,
하셨는데 지난 겨울 혼자 계시다가 마당에 주저앉아 계신 것을 다행히 내가 우리 집 계단을 내려 가다가 보게 되어서 일으켜 방에 모신 적이 있었다.
그 후로도 동네 인도 걷기를 나가시는 것을 보았는데, 어느 날 일어서지 못해서
요양병원에서 치료를 하면 되겠지 하고 낮시간에 집에 아무도 없어서 요양병원으로 가셨는데,
입소 한지 두달이 되어서는 늘 누워 있어 욕창이 나서 요양원으로 옮기고 그 욕창이 낫지 않아
휠체어도 앉지 못해  산책도 못 나가시고 입소한 지 두 달이 지나서야 욕창은 나았다 했다.
 
자식도 6남매인가 되고,
집도 그 형님 이름으로 되고 집에서 나오는 임대료도 그 형님의 통장으로 들어가고,
귀도 밝으시고 말씀도 잘 하시고,  치매가 아니어도 요양병원으로 가신,
복노인이 아닌 복노인이 셨다.
 
나는 비위가 남 달라서 젊어서도 많이 먹지 않았고,
이 나이에도 먹다가 싫으면 먹던 밥도 다 먹지 못하니 밥을 먹다가 들고 일어나니 남편이
왜 그러는가? 싫은 말을 한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왼발을 들었다 놓는데 그 자리에 주저 앉게 되었고, 한 걸음도 걷지 못해서
남편을 오라 해서 핸드카트는 남편이 가지고 가고, 횡단보도를 건너는데도 같이 있던 친구의 부축을 받아
정형외과에 갔는데 정확한 진단을 받은 것은 세곳을 옮겨 다니다 연골이 째졌다 했다.
7차례 연골주사를 맞고도 현재 무릎이 아프지는 않고, 그러다가 작년부터는 어깨가 아파서
병원치료를 두번이나 받았고, 아직도  많이 아픈날은 진통제가 들어 있는 약을 처방 받아 두고 먹는다.
많지도 않은 자식 둘은  멀리서 있고, 내 나름으로 잘 지내고 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 때부터 부지런하다고, 늘 심부름도 웃고 다닌다고,
지금까지 부지런하다는 말을 듣고 산다.
그러니 옥상정원을 한지가 15여 년이 되었고,
블로그 글을 쓴지도 20여 년이 되었다.
 
자식이 없어도 자식이 많아도 지금 세상은 복노인은 없다.
매가 걸리지 않아도 노년인 내가 보기에는 뒷집형님도,
요양사를 두 타임으로 부르고 간병인을 부르고 하는 비용을 형님이 감당하고도 남을 것인데,
그 많은 자식들은 다 같은 소리를 내지 않으면 그러면 네가 해라 할 것 같으니,
추석이 되어도 집으로 모시고 오지 못하고 요양원에서  지내 신다.


 
꽃을 좋아 하셔서 우리 집의 것을 처음에는 드렸고,
그 몇년이 지나서는 가지고 가서 심어 드렸고,
센 호스 물살에 화분가로 사이사이 흙이 뭉쳐 있어서 쓸어내는 일까지 해야 해서
내가 그렇게 할 기운이 모자라서 꽃이 핀 화분을 가져다 드렸다.
딸내미가 직장을 다니니 퇴근길에 마트에서 채소들을 사 온다 싶어서
월요장에 가면 토종 애동호박이 이쁘거나 우엉잎이나 호박잎이나 곁가지 뜯어낸 고춧잎이나
가을에는 도토리묵을 사면서 한모 더 사서 가끔 맛이나 보시라는 의미로 드렸다.



요즘 세상은 복노인은 없다.
언제 블로그 글에서 읽은 것인데 시골에  혼자 사시는 친정아버님이 계시는데,
전화로는 듣지 못하셔서 딸이 팩스를 놓아 드리니,
농사 지으신 채소도 어느 것을 어느 만큼 보내달라 하고, 필요한 것을 팩스에  적어 보내시면,
자식들과  팩스로 의사소통이
된다는 글을 읽었다.
그분의 따님의 미담이었다.
자식에게 텃밭농사 지은 것을 보낸다는 의미도 클 것이고,
자식과 소통되는 것이 얼마나 큰 보람이셨을까?
보기에 따라서는 복노인일 것이다.
 
 

'샘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런일 저런일  (20) 2024.11.09
가을 국화의 향  (16) 2024.11.08
선한 심성으로  (23) 2024.11.05
마트장 보기  (0) 2024.11.04
어느새 어둠이 내려 앉았다  (0) 2024.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