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어머니가 돌아 가신지가 10여년이 흘렀습니다.
1년간은 생각하면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이고, 그 눈물 쭈르르 흘러 내리는 것이 싫어서 하늘을 쳐다 보고 걸었습니다.
최대한 눈물 흘리지 않으려 노력을 했었어도 조용한 시간에는 스스로 제어가 되지 않게 눈물이 가득 고이고, 흘러 내렸습니다.
돌아 가신 직후 한달간 밤 10시경에 버스를 탔는데, 항상 버스 제일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세상 소풍길 마치고 5여년이 흘러가고 나니 어머니가 그리웠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부산에 살았는데, 어머니께서는 교회에 다니셨습니다.
마당에서 폴짝 폴짝 뛰어 놀다 일요일 어머니 흰색 코고무신이 눈에 들어 오면 그 시절을 수세미가 따로 없어서 채소단이
묶여 있던 짚을 모아 두었다 신발등을 씻는 수세미로 사용 했습니다.
놀다 고무신을 씻어서 툇마루에 엎어 두면 어머니께서 신발 씻는 것을 잊고 통치마에 저고리 입으시고 나오셨는데,
신발이 툇마루 턱에 씻어 엎어져 있으면 얼굴이 환~하게 웃으시면서 내딸아 고맙다 하셨지요.
어린 맘에도 평소 입던 옷이 아니고, 한복 그덜치마가 아니고 통치마에 흰색 저고리를 입으시고 화장을 하신 것도
아닌데 어머니가 그렇게 이쁘게 보였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늘 기억했다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생각없이 나오셨는데, 신발이 씻겨져 있지 않으면,
한복 통치마를 앞으로 오므고 엎드려서 후딱 씻어서 걸레로 닦으시면서 '내 손이 내 딸이다' 라 하셨지요.
그 시절이 1950년 나라가 극하게 궁핍하던 때 였습니다.
우리 엄니는 저를 참 엄하게 키우셨습니다.
제일 싫어 하는 것이 거짖말이고, 화 난다고 문 탁 닫고 나가는 것, 그 당시에도 자연공책이 위에는 그림 그리게 되어 있고,
아래는 글을 적게 칸이 지어져 있었습니다.
숙제를 하는데 그림이 맘대로 잘 그려 지는 것은 아니고, 공책 종이질은 갱지 중에도 낮은 급이였고, 지우개도 지금처럼
쓱쓱 문대면 때처럼 밀리면 잘 지워 지는 것도 아니였습니다.
그린 것이 맘에 들지 않아서 한번은 지우개로 지우고 싹 깨끗하게 지워진 것은 아니여도 두번째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한 번 더 지우다 보면 약간 찢어지기도 하고, 두번이나 지웠으니 다시 그리지 못할 정도라 공책장을 찢어 버립니다.
성질이 나서 순간적으로 쓱 찢었지만, 찢고나면 후회가 되었습니다.
호랑이 만큼 무서운 어머니의 꾸중이 있을 것이니까요.
그렇게 엄하게 자랐고, 나 자신도 또한 비록 어머니가 시켜서 하는 일도 누가 시키면 하기 싫어지고, 그렇다고 감히
어머니나 어른들께서, 시키는 일을 않하겠다고 하는 것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였습니다.
그래서 저가 먼저 해야 누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않되니 집에서도, 방학이면 부산 이모님댁으로, 큰집으로 갔는데,
설겆이, 청소를 시키지도 않는데, 하니 이모님께서는 숙이가 오면 집이 훤~하다.
모래 밭에 던져 두어도 살 아이다 하셨지요.
큰집에서는 사촌들이 5명이 있었는데, 부산이란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 살 위의 사촌 언니는 설겆이를 하고 자라지
않았고,저가 가면 설겆이를 하고 청소를 하니 큰어머니께서는 좋아 하셨습니다.
친척 어느 집을 가도 반가운 아이였습니다.
같은 울산이어도 우리가 사는 곳은 면사무소가 있고, 외갓집은 울산군이 있는 곳이라 중학교를 좀더 나은 곳으로 간다고,
중학교 3년을 외갓집에서 다녔습니다.
외삼촌이 일본에서 학교를 나오신 분이시라 면사무소를 다니셨고, 농사는 외숙모님께서 하셨던터라 일하러 들에 가시면
어둠이 깔릴 때나 되어야 돌아 오셨습니다.
학교 갔다 와서 방청소하고 5살 외사촌 남자아이 불러와서 씻기고, 여름날은 고등학교 다니는 외사촌오빠와 밀가루 반죽해서
칼국수 밀고 썰어 놓으면 외숙모님 들에서 오셔서 끓이기만 하면 먹을 수 있으니 칭찬을 하셨지요.
마당에 백철 솥 걸어 둔 곳에서 끓이는데, 또 재빠르게 땔감 가져다 놓고 불을 때고 했습니다.
저 나이 60대 후반에 이모님께 엄마가 저를 잘 키워 주신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이모님은 자기 언니가 우리 엄니이니,
너가 그렇게 말 해 주면 내가 고맙다 하셨고,
친정 숙모님께서는 같은 말을 들으시고는 잘 키워 주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너가 성씨를 잘 타고 나서 그렇다 하셨습니다.
자랑스런 이름 난 윗대가 계신 것도 아니고, 혼인 때 찾는 양반 성씨일 뿐인데 그리 말씀 하셨지요.
정직하게 키우신 것은 외할아버님께서 자식들에게 정직을 제일 우선으로 키우셨고, 그런 교육을 받은 우리 어머니께서
우리 형제들을 그렇게 키우셨고, 저도 우리 자식들을 그렇게 키웠습니다.
누가 시키는 일이 하기 싫어서 늘 시키기 전에 일을 해 왔기에 아직도 게으러지는 않습니다.
초등 고학년과 중학교 3년을 시골에서 자랐기에 형제와 이웃과 정도 나눌 줄 압니다.
식물들이 가득한 옥상 정원에서 그 아름다움과 생명감을 느낄 줄 아는 정서감도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저를 참으로 잘 키워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가 참 쪼잔 할 때가 있습니다.
상대가 거짖말을 하면 겉으로는 속아 주는데, 그 사람은 신용을 할 수가 없습니다.
최근 누구가 두번의 작은 거짖말을 제게 했습니다. 굳이 거짖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였습니다.
자기를 포장할려고 한 거짖말이였기에, 그 나이에 포장을 한다고 포장이 되어 지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 거짖말이 다반사인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냥 이해 해 주면 좋을텐데, 쪼잔하구로 그 이해가 않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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