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
벼는 수확했고 짚을 말리고 있는 풍경
이 땅은 도심 속이라 땅이 금싸라기입니다.
준서할미는 정말 농촌에서 초등학교 고학년 3년을 살았지만, 농촌살이의 기억은 그 때 3년이고, 그 때는 어려서 들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들에 밥나르실 때 농주로 담은 막걸리 주전자 들고, 마실 물 주전자 들고 따라 가거나,
이른 봄 추워서 새싹 겨우 올라온 뿌리가 달린 풀부터 쇠죽을 끓일 풀을 호미로 캐다가 풀이 자라면 낫을 들고 베어 왔고,
논둑에 풀이 그득하게 자잘 정도일 때는 늦은 봄이니 어른들께서 낫으로 베어서 지게 바소리구에 담아서 가져 오셨지요.
그 때는 보리나, 벼를 낫으로 사람이 직접 베어 수확을 했었고,
보리야 이모작으로 논에도 심지만 밭에 심었고, 논에 심었다 해도 논바닥에 물을 가두고 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래도
논에 심은 보리를 벨 무렵 비가 오면 물을 빼고 바닥을 말려서 베는 것입니다.보리짚은 물기를 별로 품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보리를 베거나 마당에서 타작을 하고 나면 보리이삭의 수염이 땀은 흘렸고, 몸에도 옷 속으로 들어가서
온 몸이 따금거렸으니 까다로운 사람을 보리까그래기라 했었지요.
논에 벼 수확 하는 것은 수확 철이 다가 오면 물을 빼서 논 바닥을 말리는데, 혹여 비가 온 다음이거나 고논일 때는
벼를 뭇단으로 베어서 논둑에 세워 놓고 말렸습니다.
벼도 마르고 논 바닥도 마르면 벼 타작기에 한단씩 들고 하기 마춤한 단으로 묶었고, 소에 질메를 메워서 싣고,
볏단을 집 마당으로 들여셔 타작을 했었습니다.
딱 한번 뭇단을 작게 묶어 놓으시면 그 단을 소에 싣게 소 가까이에 들고 나르는 일- 그 들일을 하루 해 보았는데,
얼마나 힘이 들고, 그 다음날 다리 팔이 아퍼던지요.
논 바닥에 물을 빼고 바닥이 마르면 벼를 베면서 바닥에 바로 눕혀 놓았다 작은 단으로 묶어서 집으로 들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낫으로 베고, 소에 실리게 하고 하는 동안에 벼 이삭이 많이 떨어 집니다.
그러면 주인들이 일차로 이삭을 줍는데, 어른들이 바쁘시니 우리 어린 아이들이 이삭을 주웠지요.
그러나 어린아이들이 주으면 얼마나 알뜰하게 주웠겠습니까?
보리 수확하고 모심기 하는 철에 가정실습이라고 일주일 그 당시 시골학교가 휴교를 했습니다.
가을 벼 수확 철에도 휴교를 했습니다.
가정 실습기간이 지나고 학교를 다시 나가게 되면 이삭을 주워 오라고 합니다.
학교에서 그 이삭을 모아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준다고 했었는데, 모으면 꾀나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이삭'은 그 배 고프던 시절에 여유 였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어른들께서는 알뜰하게 주으라는 말씀은 없으셨고, 그냥 소 질메에 볏단을 올리면서 이삭을 주으라 하셨을 뿐이였습니다.
우리가 학교에 내는 것은 자기 집 논이나 밭에서만 이삭 줍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학교 길에 오다가 아무 논에나 들어 가서 메뚜기를
잡는지? 우리들간에 잡기를 하는지 그렇게 뛰어 놀듯이 하면서 주웠고, 본격적으로 줍는 사람은 논, 밭이 없는 사람들이 주웠습니다.
그 분들은 먹을 양식이 생기는 일이라서, 정말로 열심히 줍기에 제법 많은 곡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곡식 수확해사 탈곡해서 내 집에 들인 것을 한 바가지 푹 퍼내어서 남을 줄 여유가 없던 시절에 그리 알뜰하게 줍지 않았던
것은, 농사도 없는 배고픈 집에서 주어 갈 수 있게 했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잠재 된 의식이었을 겁니다.
이삭은 이삭 줍기로 연결 되는 여유이다 싶었습니다.
블로그 벗님 포스팅 중에 고구마 이삭줍기 하신 것을 보고 생각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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