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어르신들 영이 서는 시절

이쁜준서 2015. 12. 10. 06:29

 

 

 

예전 시골에서는 같은 성씨들의 마을이 군데 군데 있었습니다.

우리 성씨들은 본은 경북에 큰 마을을 이루고 있고,

우리 아버지 고향에서 네 다섯집씩 옹기종기 모인 동네를 지나서

윗 쪽으로 올라 가면 또 네 다섯집 있고, 도랑을 건너서 또 네 다섯집 있고, 그렇게 전체를 보면 큰 동리가 되었지만,

기본적으로 그 규모가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자연 속에 몇집 집 지어 살고 또 집 지을 편편한 땅을 찾아 집을 지어 사는 자연부락이였습니다.

고조부님의 윗대 산소도 있었는데, 그 산소들은 보통 봉분하고는 격이 다르게 큰 산소도 몇기 있었습니다.

아마도 고향을 등 지고 나와서 새로 삶의 터로 자리 잡으셨던 우리 윗대 조상 중에 한분이 계셨고, 우리 고향에 터를 잡으셨던 모양이십니다.

그 격이 달랐던 산소는 재작년에 고향으로 가 보니, 고분군이라는 유적지 공고 간판이 있었습니다.

 

우리 선산의 아주 윗대 묘는 도굴이 되었고, 우리 할아버님, 할머님께서 선산 아랫 쪽에 계시는 것으로 더 이상 산소를 서지 않았는데,

준서할미가 어려서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논 둑에 소 풀어 두고, 아이들은 우리 선산으로 올라가서 숨기 놀이를 했는데,

그 당시 도굴 된 묘 근처는 무섬증이 들었지요.

그 선산이 한 20년 전부터인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넓은 들 쪽에는 큰 그랑 방천 뚝 안쪽에 우리 고향에서는 제일 넓은 들이 있었는데도, 그 들 중간 중간은 돌무지가 있었고,

큰 돌들이 있어 새을 후치러 가면 그 큰돌에서 놀았는데, 그 돌이 돌무지 속에 묻혀서 윗 상판만 나와 있었던 고인돌이였습니다.

밭둑에서 놋그릇 닦는다고, 깨어진 옛날 기왓장을 호미로 캐다보면 병과, 그릇의 파편도 나왔었습니다.

 

 

우리 마을의 행정명은 따로 있지만, 블로그 상에서 부르는 닉 같은 것의 명칭은 [ 밭가분데]였습니다.

정말 - 밭 가운데 다섯집이 옹기종기 있었습니다.

같은 친족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라서 도시에 나간 직업군인이 오면서 군용건빵을 가지고 오면,

우리 동네 한참을 걸어서 가는 윗동네까지 건빵 봉지 들고 인사를 가셨지요.

찹쌀가루 디딜방아에 콩콩 찧어서 쌀수제비를 끓이면,

윗동네 할머니들까지 오셔서 같이 드셨지요.

그 심부름 국민학교 고학년인 저가 했습니다. 폴짝 폴짝 뛰면서 모시러 갔었습니다.

 

장가 가서 색씨 처가에 묵혀 두고,  처가로 갈 때 처가 어른들이 계시니, 또 디딜방아에 쌀가루 빻아서 떡 조금해서 보내고

처갓집에서 올 때 조금 가지고 온 것등을 차반이라 불렀는데, 그 차반도 동리 어른들과 함께 드셨습니다.

요즈음은 연세 많으신 분께 엉덩이에 뿔난 사람들이 조금만 못 마땅하면 나이 먹은 것이 자랑이가?라 면전에서 닥달을 하기도 하지만,

그 당시는 정말로 연세가 드시면 -글자 그대로 어르신이 되셔서 비단 가족이 아니라도 이웃들에게도 어르신 대접을 받으셨고,

대소사에 말씀은 큰 조언으로 들었던 시절이었다.

 

어르신들 상호간에도 연세에 따라서 등급이 있는 것처럼 연세가 높으신 분을 깍듯이 대 했습니다.

그 중에서 조금만 기분에 맞지 않으면 옆 사람을 때리거나 폭언을 하시는 분도 계셨어도, 그런대로 손 윗 분으로 대접을 하시고들

사셨지요.

 

기왓장 골에 마른이끼 같은 이야기 일 수도 있어도, 그 시절은 비록 배 고픈 시절이었어도 이웃 어른들께도 대접을 했었고,

그런 맘을 본심이라 할 수 있고, 그 본심이 살아 있는 세월이어서 맘의 기준이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준서할미 세대는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입니다.

그냥 그리워서 하는 넋두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