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콩나물 경죽과 김치 밥국( 김치 죽), 씨래기 경죽

이쁜준서 2014. 9. 30. 06:52

 

 

 

 

미역취 꽃

 

준서할미 어린 시절에는 여름에는 햇보리가 탈곡에서 정미소에서 보리쌀로 찧어 오면,

그 때부터는 거의 깡보리밥 수준으로 먹는다.

햇 밀을 수확해서 밀가루로 빻아 오면 아이들은 신이 난다.

저녁으로 꽁보리밥을 먹지 않아도, 입 속에 들어 가면 매끄럽게 씹을 것도 없게 넘어 가는 손칼국수, 수제비를 먹을 수 있었으니.

손칼국이건, 수제비이건, 밭에서 따온 애동호박 넣고,  햇 감자 썰어 넣고, 끓이면

지금처럼 건멸치를 집에 두고 먹던 그런 호사스런 때가 아니여서 샘물만 붓고 끓였는데도 구수하고 얼마나 맛나든지.

재료 자체가 어우러져 나오는 그런 맛을 요즘 자라는 내 자식들은 모른다.

즈그들이 태어 나기 전부터 건멸치 육수를 내어서 먹었으니.

 

그렇게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와서 벼를 수확해서 정미소에서 햅쌀을 찧어 오면,

그래도 쌀이 상반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섞인 밥을 온 겨울동안은 먹는다.

김장을 하고 난 한 겨울은 보리쌀과 쌀을 아끼기 위해서 구덩이에 묻어 두었던 무를 내어 저녁밥을 먹고  하루의 일과가 끝난

겨울 밤에는 무를 썰어서 그 다음 날 아침밥은 무밥을 했었다.

무밥에는 보리쌀이 들어 가지 않고, 쌀만으로 밥을 지었다.

그 무밥은 덜큰하고, 무 밥을 한 솥의 숭늉은 무 냄새가 나고 얼마나 먹기 싫었든지.

 

한 겨울 낮에는 아침에 한 밥이 식구들 다 먹을 양에 모자라면, 김치를 넣고 김치죽을 끓였는데, 김치죽이라 부르지 않고,

김치국밥이라고 불렀다.

김치가 맛이 들어야 김치국밥이 맛이 나기에 김치가 맛들고 난 후에라야 김치국밥을 해 먹었다.

 

저녁밥으로는 역시나 보리쌀과 쌀을 아끼려고 콩나물죽을 끓여 먹었다.

콩나물을 집에서 길러서  그 콩나물 시루에 나물이 끝이 날 때까지 저녁은 언제나 콩나물경죽이었다.

그러다 아주 가끔은 된장 맛은 난듯 만듯하게 넣고, 씨래기 경죽을 끊여 먹었다.

 

콩나물과 씨래기로 만든 죽은 경죽이라 불렀고,

김치를 넣고  식은 밥 덩이를 넣고 끓인 죽은 김치밥국이라 불렀다.

참 그러고 보니 경죽은 쌀을 넣고 끓였고, 김치죽은 식은 밥을 넣고 끓이긴 했다.

 

우리 세대을 중에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죽을 많이 먹고 자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건강식이였네.

 

준서할미 40대까지는 정말 많이 아퍼서 밥을 먹지 못하면 김치죽을 끓이다 마른 국수  조금 잘라 넣고 죽을 끓여 먹었는데,

50대가 되었을 때부터는 김치밥국이 맛이 없어졌다.

우리 아이들 자랄 때는 고열이 나고 밥을 먹지 못하면 녹두죽을 끓였고,

준서를 키울 때는 고열이 나고 밥을 먹지 못하면 전복을 사서 전복죽을 끓여 주고  길게 감기가 끌게 되면 깨죽을 끓여 주기도 했었다.

 

 

요즈음 건강식이라고 권하는 것이,

양식이 모자라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소식이었고,

우리가 어린시절부터 나라 형편이 조금 피던 전까지인 1960년대까지 먹었던 음식은 거친음식이었다.

쌀이 1년 먹을 양식에 절대 양이 모자랐기에 나물을  많이 먹었고, 나물죽을 많이 먹었고,  건멸치마저도 없이

그냥 샘물에 자연 재료만으로 음식을 했던 것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거친 음식을 먹고 자랐다.

 

우리가 어린 시절은 밭에 퇴비를 넣고, 농사를 지었으니 땅의 오염도 없었고,

환경의 오염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는 읍내에 나가야 국민학교가 있었으니 십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등하교를 했으니 참 많이 걸었다.

그 때의 걷는 능력이 몸에 배여 있어서 나 자신의 젊은 날보다는 속도가 떨어져도 지금도 길 나서면 속보로 걸을 수 있다.

8살만 되어도 동생들을 업고 다니고, 밭에 나간 엄니가 늦게 돌아 오시니, 동생들도 불러 모아 세수와 발을 씻겨서 건사 했었고,

중학생 정도만 되면 엄니께서 들에서 늦게 돌아 오시니, 저녁 준비를 하기도 했었으니,

 

요즘 교육자님들께서 어린아이들에게 자립심과 자존감을 심어 주라 하는 것은 저절로 생겼던 세대들이다.

그런 세대가 저녁이면 죽 먹고 자랐던 우리들 세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