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양지와 음지

이쁜준서 2013. 1. 6. 15:26

 

 

준서할미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살았던 부산이란 도시에는 지금은 산 이름을 잊었지만,

학교 교문 앞 쪽에는 보초병이 있는 부대 정문이었고,

학교 뒷 쪽에서 한참을 올라가면 산이 있었고,

그 시절에는 빨래를 마음 놓고 수도물을 받아서 할만큼의 수도물이 없었지요.

각 가정에 수도가 들어 와 있던 것은 아니고, 너른마당에 공중수도에서 그것도 24시간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여서

함석으로 만든 물통과 바켓등의 그릇을- 그 때는 지금에 고무다라이나 플라스틱류도 만든 그릇도 없던 시절이어서

길게 줄지어 기다렸다 물을 받아 집에 독에 부어 놓고 쓰던 시절이었지요.

 

그 산 계곡에는 물이 흘렀고,

그 계곡으로 이불호청 같은 큰 빨래를 가지고 가면 양은 솥을 걸어 놓고 빨래를 삶아 주고 돈을 받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게 삶은 빨래를 계곡에서 씻어서 야산 키 낮은 나무에 펼쳐 널어서 말려서 집에 왔었지요.

그런데 그 산 밑에는 그 때로서는 아담한 집들을 신축해서 들어선 곳이 있었는데,

6.25전쟁에서 상이용사님들에게 나라에서 지어서 분양 해준 집이라. 등하교 길에 상이용사들을 자주 보게 되었지요.

 

그런 가정만 어려운 것이 아니고,

일반인들도 배가 늘 고팠고,

그러나 그 당시 초등학교에도 월사금이라는 것이 있어, 그 월사금을 다달이 내어야 했는데,

아침이면 학교에 가면 선생님께서는 몇달 밀린 월사금을 내라고 하시고,

집에서 엄마는 달라하면 늘 내일 준다하고 줄 수 없는 형편이라, 아이들은 책보따리를 허리에 메고서는

월사금 달라고 학교을 가지 않고, 울고 서 있으면 그 엄마는 줄 수는 없어도 학교는 가게 해야 하니

엄마가 달려 오면 아이도 달려 가고 또 서서 울고, 또 엄마는 아이에게로 학교로 쫓으러 오고,

 

도시에서 날품팔이라도 신체 건강하고, 마음 강단이 있는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보니

그런 일도 못하는 남정네들이 막걸리 받아 마시고, 식구들 괴롭히는 것은 비일비재 했었지요.

그렇게 아버지 막걸리 술 심부름 하던 아이들이 자라서,

남자 아이들은 그래도 부산에 신발공장이 많아서 신발공장으로 일 하러 갔고,

여자 아이들은 미싱 몇 대 놓고 하는 미싱공장으로, 갔고, 또는 직조공장으로 가서 돈을 벌어서

시골의 집에 소도 사 드리고, 전답도 사 드렸고, 주로 남동생 공부도 시키고,

도시에서도 가계에 많은 도움이 되었지요.

 

그  시절은  실내에서 2층으로 올라 갈 수 있는 2층집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면

그 때는 재벌이 없던 시절이라 최상의 부자로 생각했었지요.

양지와 음지가 그렇게 극명하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요즈음은 정말로 양지와 음지가 극명합니다.

오늘은 그런 음지 가정에서 자란 20대 부부의 이야기 입니다.

TV프로그램에 각계의 패널들이 여러 사람들이 나와서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고민 상담을 신청한 한 건의 사람이 나오고, 여러  패널들께서 진단 하고 조언도 하는 그런 프로그램이지요.

 

신청한 사람은 22살에 결혼해서 3살 아기가 있고, 지금 현재는 임신 6개월차인 어린 엄마였고,

26살의 남편이고, 아빠인 사람도 나와서 각기 자기 이야기를 했었지요.

처한 환경이 각박해서 아기 엄마는 남편은 술에 취하면 때리고,적은  생활비도 남편이 관리하니  숨도 못 쉴 정도이다보니,

그 스트레스 푼다고 아기를 맡겨 놓고, 아주 간혹 친구들과 술도 먹으러도 가고, 아기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은 있어도

절약의 차원이 아닌 정말로 극빈한 경제환경이라 못 하니 노래방 도우미로 남편 모르게 나가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남편은 제대로 사랑 받고, 교육받고 자란 사람이 아닌 듯 했는데,

이야기를 다 들은 정신과 의사선생님은 충동적인 행동을 억지하게 상담도, 약물 치료도 필요한 사람이라 했지요.

아내를 어쩌다 한번 때리는 것이 아니고, 술만 먹으면 충동적으로 폭행을 하는 상황이었지요.

 

패널들께서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남편을 일방적으로 나무랄 수도 없어서, 절대로 때리지 말라고 집안 어른들이 타이르듯이 타이르고는

누구 한사람이 아니고, 패널들께서도 눈물이 글썽이게 되면서

한의사님은 아기를 낳으면 조리원에서 조리를 시켜 주겠다  하시고,

정신과의사선생님께서는 상담, 약물치료를 해 주겠다고, 하시고,

음식 연구를 하시는 분은 아기 돐잔치 때 음식을 장만 해 주겠다 하시고,

아기 첫 돐 때 아기 돌복을 해 주시겠다 하시고,

아기 돐 잔치 때 사회를 해 주시겠다는 연예인도 있고,

돐잔치를 할 상황이나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적으로 그 젊은 부부의 말을 귀담아 들어 주는 사람들도 없는 음지에서

22살에 아기를 낳고 기르고, 지금은  25살인데 다시 둘째를 임신하고 ,

22살에 혼전 임신을 하게 되었고,

그 때도 때리는 상대가 결혼하고도 때리지 않을 자신이 없어 때리지 않는다고 약속하지

못하겠다는 남편의 말을 듣고도,

뱃속의 아기를 지키려고 22살에 결혼을 했고, 4년간을 수시로 맞으면서도 극빈의 경제 속에서도 낳은 아기를 기르고

어쩌다 보니 둘째가 또 임신이 되었을 것이고, 또 뱃속의 그 생명을 키워 나가는

요즘 세상에 에미들로서는 귀감이 되는 요즘 세상에서는 어린 에미가 참으로 장 해 보여서일 것입니다.

 

따뜻한 물과 찬물이 있으면 따뜻한 물이 찬 물 쪽으로 가서 온도가 같아진다 합니다.

패널로 나오신 분들도 어린시절은, 또 결혼해서 고생을 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지금은 기득권이고, 양지에 계신 분들이신데,

그 분들이 음지에서 자라서 사랑이란 것으로 남이 배려 해 주는 것도 받아 볼 수 없이 자라서

꼬시래기 제 살 먹듯이 부부간에 서로 할퀴고, 3살난  제 자식의 평생이 걸린 인생을 망가지게 해 가면서 살아 가는 것을

그렇게 사랑으로 보듬어 주신 패널들이 있어,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 가면서 살아 갈 것을 생각하면서 준서할미도 잠시 눈물을 닦았습니다.

 

양지에서 아이들 키우면서

요즘은 1~2명을 낳고 기르다 보니, 좋은 옷들도 아직 새것인 것처럼인데도 작아져서 못 입는 옷들도 허다하고,

책들도, 문구들도 허다 하게 남습니다.

그런 것들이 이 부부들처럼 극빈의 가정으로 돌아 갈 수 있기를 바래 봅니다.

 

우리 지방에 몇 번 온 눈은 계속된 한파에 북쪽 인도에는 온 겨울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면서

그 눈이 다 녹자면  3월이 오고, 비가 와야 잔설을 다 녹일 수 있습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남쪽 인도에도 상가 앞은 눈을 치워서 사람 다니는 정도는 길이  좋지만,

아파트 담장이 있는 곳이나, 공원 앞이나는 아직도 빙판길을 조심해야 합니다.

 

준서할미 세대들은 겨울이면 따뜻한 햇빛이 비취는 담벼락에 기대서서 놀기도 했습니다.

물론 추웠지만 추워도 그렇게 놀았는 것은 사람과 사람간의 소통이 되었고, 빈곤한 시대였으니 서로간에 격차가 없었고,

배는 고파도 집에 가면 할머니, 엄니의 따뜻한 사랑이 있었고,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도 있었지요.

그 시절은 지금에 생각해  보면 음지보다 양지가 많았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