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사람 4 (한 어촌에서의 방송을 보고....)

이쁜준서 2008. 11. 16. 08:46

 

팔공산의 바위

준서할미는 바위를 좋아한다. 저 만고풍상을 격으면서 태고적부터 있어 왔을 바위를....

 

 

 

집에 한켠에서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오래된 한옥은 수리를 해마다 하듯 했다. 그래도 별 번듯한 차이도 나질 않았지만, 그 때는 하루 두번 새참, 점심밥을

공사를 하는 집에서 제공했다.

뜨신점심했다고, 동네 어른들도 오셔서 점심에는 한술 거들기도 하셨다.

그 시절에는 공사하시는 분들이 그리 많은것이아니어서, 그 공사하시는 분이 그 동네 이집 저집 거의 다 하고 계셔서

다들 안면이 익숙하기에 때때로 점심 한술이 끝나고, 막걸리 한잔씩 하고 하하, 호호 웃음이 가득했기도 했고, 혼합된 세멘트 본 김에

작게 떼어 붙이는 일은 집주인들이 손 수 하기도 했고, 일거리가 그리 크지 않을 때는 집 주인이 뒤모도(뒤의 잔일을 거드는) 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밥 해주는 일이 없다.

그냥 통채로 공사금액이 나온다.

 

인정이 넘치던 그 때 그 시절을 오늘 아침 TV에서 보았다.

경남 경주 양남 수렴리 마을에 가 녹화한 방송이었다.

어촌이었고, 아마도 농사도 있을 것이다.

준서에미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여름 휴가를 두번 그곳 양남으로 갔었기에, 그 양남의 바닷가는 알기에 그리 생각한다.

농촌보다 어촌은 풍부한 해산물을 함께 먹을 수 있어, 더 건강하신 듯 했다.

바다로 1.6Km 나가면 전어, 고등어보다 더 큰 고기 방어가 잡힌다면서 방어를 잡을 수 있는 바다로 나가는 배에 부딛히는 바닷물은

그야말로 청청바다였다.

배는 계속 움직이고, 낚시하는 낚시줄에는 고기가 아닌, 작은 것이 배의 움직임으로 방어가 볼 때 먹잇감인줄 알고, 따라 오다 낚이는

그런 낚시 방법이었다.

작은 고깃배였고, 고깃배가 출렁이는 바닷물에 떠 움직이는 것이 위태위태하게 보일정도 였다.

배의 선장인듯 하신분이 낚는재미, 먹는재미에 이 배를 탈 수 밖에 없다 하셨다.

바다가 배경이 된 그 선장님의 당당하신 모습은 꾸민것이 아니고, 삶 자체여서 그리 보기에 좋았다.

 

마을회관에 모인 장면에서는 거의 칠순이 넘기신 안밖의 어른들이 아주 건강하셨다.

몇분을 인터뷰하는데, 언제가 제일 좋으냐는 질문에, 아침, 저녁 안부전화가 제일 좋고, 또 손자,손녀들과 연결이 되면 길게 이어지는

자손들과의 대화가 제일 좋다고 하셨다.

그 칠순의 어른들이 언제 부모생각이 많이 나느냐? 고 물었더니,

사는게 힘들 때 부모생각이 나고, 특이나 시부모님이 생각이 난다 하셨다.

자식 부모사랑은 겉으로 하는 것이고, 부모 자식사랑은 속으로 하는 것인줄도 모르고, 그 젊은 시절 시부모님께 그렇게 잘 못했던 것이

지금은 가셨지만 맘에 남는다 하셨다.

어느분이 더 생각이 나느냐는 질문에는 어머님, 아버님 다 생각이 난다고들 하셨다.

 

후회 되는 것이 무어냐는 질문을 받은 밖어른께서는 좋은 대학 이공계를 다니다 진로를 바꾼다 할 때 왜 그리 반대를 했던지 미안하다 했다.

묻는 말에 대답이 그러했지, 삶을 살아오시면서 겪어셨던 것들이 어찌 그 뿐이겠는가?
노년 초입의 준서할미도, 여러가지가 생각되는 요즘인데....

 

작은 배에서 풍어제를 지내는 장면도 있었다.

빌고 또 비는 무당으로 보이는 할머니께서도 팔순이 넘으신듯 했고, 그댁 할아버지는 구순이라고 했다.

그랬는데, 충청도에서 온 큰며느리는 결혼했을 때부터 기독교를 믿고 있어 아직도 제사는 그 할머니께서 음식을 다 장만하시고,

제사도 직접 모시는데, 큰며느리는 기독교를 믿는다고 절하지 않은 음식을 따로 먹게 해 주신다고 했다.

그 며느리가 그 시어머니를 어찌나 하늘같이 받드는 이야기를 하던지.

몇십년을 살아오면서 끈끈하게 이어진 사랑을 볼 수 있었다.

딴집 살림을 하는 모양이었지만, 무당시어머니와 기독교인인 며느리의 20년간의 화합하는 사랑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 맑은 바닷물이 지금도 눈에 남아 있고, 강가의 돌처럼 흔하디 흔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맑은 바닷물 같아서 남겨 두려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