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아름다운 인연들

이쁜준서 2019. 12. 14. 16:35





40년지기 중에서 나와는 6살 차이가 나는 우리들의 막내가 있다.

자랄 때도 시골에서 홀어머니와 둘이서 자랐으니, 외로웠을 것이고, 남편은 6남매 맏이고, 시부모님은 계셨다.

결혼하자마자 도시 방한칸에서부터 출발 했는데, 남편이 공장에서 일 하면서 큰 사고가 나서 다 나을 때까지,

맘을 다스리기 힘들었을 남편의 수발에 고비도 겪었다.

남편은 강한 생활력으로, 우리 동네로 이사 와서 동네 슈퍼를 했고, 시골의 시부모님도 오시게 되고,

시남매들 다섯의 결혼식도 자기 손으로 치루었어도  항상 숨을 죽이고 살았다.

아들 둘을 낳아 길렀어도 남편이 매일 물건을 하러 장으로 갔고, 그 장에서 남편이 아이들 옷을 사다 입혔다.

그 아들들이 대학교에 가서 자기들이 옷을 사 입었다.

이사를 몇번 다니면서 동네 슈퍼도 더 크게 했는데 동네가 재개발 되면서 아파트가 되고는  봉재공장으로 일을 하러

다니면서 월급을 타서 자기 맘대로 쓸수 있다 했다.

그 때서야 대학생 아들들 용돈도 주고 살다 며느리, 며느리 후보감의 생일도 챙겨주고 한다고 했다.

40년지기들 모임이 있어 연락을 하면,

옆에 없을 때 ' 아지매 전화 왔다'고 그 남편은 유독 내 전화만 반갑게 받아 준다고 했다.


둘째 아들이 아기를 낳으니 큰아파트로 전세를 얻어 함께 살더니 그 아기가 초등학교 4학년인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는데, 이제 서로가 분가를 한다 했다.

아들은  도시화 된 시골에 전원주택에 짓고 있고, 자기들은 우리 도시 경계선의 시골 집을 샀는데,

새로 수리해서 내년 3월경 이사를 갈 것인데 그 시골집이 면사무소 앞이고 땅이 텃밭까지 180평이라 했다.

내 동생의 일같이 반가운 소식이였다.

11월 계약하고 와서 그 날  형님에게 제일 먼저 전화 했는데 받지 않고, 몇번 전화해도 받지 않더라 했다.

한창 몸이 좋지 않아서 부재중 전화도 챙기지 않고 지내던 때여서 그리 되었지 싶다.

자기 형제도 없고, 친정 엄마도 계시지 않고, 정말로 반가워 해 줄 사람이 나였던 것 같고,

그 친구가 고생한 젊은 날까지 알기에 실제 정말 반가웠다.

서로가 맘이 통해서 살아온 세월도 고마웠고, 참고 참고 살아 온 뒤 끝이 풀려서 이제는 남편도

마누라 귀한 줄 알고, 두 아들들이 엄마를 참으로 귀하게 대접하는 것도 반가운 것이다.


2019년 한번도 만나지 않아서, 40년지기들을 만나자는 약속을 잡기 위해 앞앞이 전화를 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얼굴 보여주기 싫어서 오지도 않는 사람을 찾아가서 점심 한번 사주지도 못하겠고,

전화도 못하겠고 해서 카톡만 한번씩 넣었다는 친구와 한참 수다를 떨었다.

12월 31일 하루만 만날 수 있다는 시골의 친구에게 맞추어서 그 날로 잡고, 장소도 잡고 단체 톡방에 올려 놓고,

그 날이 2달에 한번 처방 받는 날이라  조금 늦을지 모른다고 시골 친구에게는 알렸다.


따뜻한 봄날이 되면,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친구네도 한번 가고, 우리 도시와 행정지역은 달라도 승용차로 20분거리인

이 친구의 집에도 놀러 가야 겠다.

우리 세대는 월세방 한칸 얻고, 번듯하지 않아도 월급 받는 직장만 있어도 결혼들을 했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부흥시기였던 파도도 같이 타고 자식 낳고, 자식 키웠고 이제는 다 같이 노년이다.

40여년 친구들은 정말로 참새처럼 살았다.

40대 초기 여름에, 작은 압력솥까지 챙기고 반찬을 해서 시외버스타고 막내들을 데리고 인근 시골 그 마을이

친정인 곳의 다리 밑으로 놀러 간 적이 있다.

그것이 물놀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자란 각자의 자식들은 어느 한집도 애 먹이는 아이들이 없었고, 이젠 자리들도 잡았다.

그 세대가 40대들이고 이 사회의 중견이고 주축 들인 것이다.



2010년 여행 첫날 서울역에 내려서

경복궁으로 걸어 가던 중에 광화문 광장 화단에서 찍은 사진,

그 때는 농성하는 천막이 없는 녹지에 화단이 있었습니다.


60대에 서울로 2박3일, 처음으로 놀러를 갔다.

한 친구의 정년 퇴직한 교장선생님이셨던 남편이 전철 환승도 못할 사람들이 서울구경을 간다고 하니,

자처해서 계획을 짜고 우리의 대장이 되어 주셨다.

우리들은 그 여행을 수학여행이라 불렀다. 교장선생님이 인솔자였으니.

첫번째는 준서에미가 즈그 집에 와서 주무시라고 했고, 점심시간에 나오겠다 했다.

실제 잔곳은 우리들 대장이 되어 주셨던 댁의 총각 아들 집이였다.

한 마을에서 낳아서 10여년을 살았던 동네분들이니 엄마 친구가 아니고, ' 엄마들' 인 것이다.

그 엄마들과 아버지 몇분과 해외여행시에는  이글의 주인공인 친구의 아들이 인솔자로 나섰던 것이였다.

40여년 동안의 지기들이라 이제는 서로를 참으로 아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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