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 시골 농가였어도 엄니들은 밥을 실컨실컨 끼마다 잡수시지 못했다.
여름에는 큰 가마솥에 밥을 지으면서 적은 양의 쌀은 보리쌀 위에 섬처럼 부어서 밥을 지었다.
그 조금 얹은 쌀은 할머니, 할아버지 밥 그릇에 보리쌀과 섞어서 뜨고, 젖을 뗀 아기 밥을 퍼고, 도시락 밥은
보리밥으로 뜨고, 보리쌀과 쌀을 약간 섞어서 위에 덮고 그러고 나서는 풀풀 주개로 섞어서,
아버지밥과 머슴아재 밥을 퍼고 각자 밥 그릇 따로 퍼는것이 아니고, 양재기에 퍼서 덜어서 먹었다.
그러니 남의 집에 어쩌다 볼일로 가서 해 놓은 밥을 같이 먹게 되는 경우에는 그 댁 밥 하신 분의 밥을
축 내는 것이라 참으로 미안해 했고, 밥 하는 안주인은 괜찮다고 찬이 변변하지 못해서 그렇지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얹으면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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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고학년 3년을 부산에서 시골로 전학 갔었고, 면사무소가 있는 그곳에도 중학교가 하나 있었지만
군이 있는 곳으로 중학교를 보내고 싶어 하셨고, 그렇게 외갓집에서 중학교 3년을 살게 되었다.
그 때 외할머니가 계셨고, 미안해 하는 시누이에게 외숙모는 숟가락 하나만 더 얹으면 된다 하셨고,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어진 것으로 시작 했다.
외할머니께서는 부산에 딸들이 셋이나 있어서 자주 부산으로 가셨고, 외숙모님은 늘 들에 농사일 하러
가셨다 해가 져서야 돌아 오셨다.
더 늦게 돌아 오시면 외사촌 오빠와 함께 칼국수를 준비 해 두기도 했고, 방청소, 어린 외사촌 동생
데려와 씻기기도 하고, 부엌일도 도우고, 겨울에는 외할머니와 내가 자는 방에 군불을 때면서 식구들이
씻을 따뜻한 물을 덥혀 놓았고,
외삼촌께서 면서기셔서 출근을 하시고 농사일은 도우지 않으셨고, 외할머니께서는 아침 일찍 논으로 나가
물꼬를 봐 주시기는 해도 밭일, 집안일은 도우지 않으셨다.
해 놓은 밥상에 얹혀진 숟가락 하나가 당당한 식구가 되어서 3년을 살게 되었다.
태어나서 젖을 떼고 자기 스스로 밥을 떠 먹게 되면 숟가락은 누구나 하나 자기 몫이 있다.
성장기가 지나고 어른이 되고, 어느 날 숟가락 들 힘도 없다 하면서 숟가락을 놓으면 그 이후 얼마간
더 사는 것이야 다르지만 잠시 왔던 세상 소풍길을 마치게 된다.
숟가락은 우리들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중한 것이기도 하고, 어느 집이나 자기 식구들만의 것만 있는 것은 아니고, 숟가락 통에 가득 꽂혀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손님이 와도 그야말로 숟가락 하나 상에 얹는다고 하면서 객 식구는 자주자주 있었다.
돌아가신 분이 있어도 그 분이 사용하셨던 숟가락을 버리는것은 못 보았고, 그냥 안 보이는 곳에 두었지 싶다.
숟가락은 먹는 것의 상징이라면, 요강은 비우는 것의 상징이었다.
측간( 지금의 화장실)은 멀었고, 전깃불도 없었고, 밤중에 측간에 갈 수 없으니 요강을 두고 사용 했다.
새댁이 결혼 해 오면서 놋요강을 가지고 왔고, 그렇게 살다가 아기를 낳고, 아이들이 크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기요강으로 바꾸어졌다.
사기 요강은 컸고, 앉아도 편했다.
큰엄마가 중병으로 자리 한지가 오래 되셨고, 그러다 돌아 가셨다.
지금이야 장례병원으로 가면, 돌아가신 분은 따로 모시는 곳에 있고,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받고 하는데,
1970년대만 해도 시골에서는 망자를 모시고, 병풍으로 가리고 그 앞에 빈소를 차렸으니,
초상이 나가는 때까지는 망자는 병풍 뒤에 계셨다.
상여가 나가고 상주가 따라 나가고 나니, 친척 할머니들께서 망자가 쓰셨던 요강을 깨어서 버리는 것을 보았다.
시어머님께 왜 요강을 깨는지를 여쭈어 보았더니 나는 요강 깨어서 버리는 것은 못 보았다고 하셨다.
지방마다 다른지도 모르겠다.
지인들 중에 돌아 가시는 분들이 계셨고, 중병으로 서산에 해 걸린 듯이 계신 분도 계신다.
늙는다는 말을 참 싫어 했는데, 그 말도 받아 들였는데, 이제는 지인들 중에서 세상 소풍 마치신 분들이
있어지는 것도 받아 들여야 한다.
숟가락 하나의 무게는 살아 가는 생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