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문
- 뜻
- 잡목의 가지를 엮어서 만든 문짝을 단 문 더보기
정낭-
뜻
뒷간의 방언( 경상도, 강원도)
동해남부선이 지나가서 산골을 면한 , 그렇기도 하고 평지라서 산골도 아니였고,
준서할미 고향은 준서할미가 결혼하고 선산에 인사차 갔을 때도 전깃불이 없고, 새 사람 왔다고 우리가 잘 방에 촛불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 때 우리 마을은 집 뒤란은 황토 흙과 돌로 낮으막한 토담이 있었고(물론 개구멍은 있었고),
집 서쪽이나 서북쪽으로는 대밭이 있었고, 집 동쪽과 남쪽으로
'ㄴ'자를 오른쪽으로 눕힌 듯이 역시나 토담이었고, 그 토담 앞에는 한 채의 초갓집이 있었는데, 동쪽으로 정낭이, 그 옆에는 재를 퍼 모으고,
농기구들이 들어 있는 헛간이, 헛간 옆에는 디딜방앗간이, 그 옆에는 도장(곡식등의 먹거리를 넣어 두는)이 있었고,
삽작문을 중앙으로 채전밭이 좌,우로 있었고,
삽작문을 들어 오면서 왼쪽은 토담을 하지 않고, 싸리등으로 밖이 훤히 보이는 울타리를 했었습니다.
마당과 연결 된 듯하지만, 마당에 두엄더미가 있고, 울타리 밖은 채전밭이고, 또 툇마루에 올라 서면 동해 남부선 기차가 가는 것이
훤히 보였습니다.
그 때 그 시절에는 시계가 없었습니다.
라디오도 있는 집이 마을에 없었고, 동해남부선 기차로 시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그 마을에는 부산으로 나가서 열차 공무원을 하는 아재들이 있었고, 우리집도 큰아버지가 열차 공무원이셨습니다.
그래서 부산의 자식들, 부산의 형제들 집에 포뜩 포뜩 나갈 때면 몇시 차 타고 오겠다 약속하고 나가고 무거운 짐은
우리 집 앞으로 열차가 지나갈 때 밀어서 던지고 던진 물건꾸러미 주어 오고 그랬습니다.
우리 집 앞을 지나 5리정도 가면 열차 역이 있었고, 열차에 내려서 무거운 짐 없이 가볍게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지요.
지금은 그 역에는 열차가 서지 않더라구요.
준서할미가 초등학생인 어린 시절 우리 마을에서는 결혼식은 신부집으로 가서 하고, 1년여 신부집에서 지내고,
신랑은 집으로 와서 농사 지으면서 지내다 한번씩 처갓집으로 다니러 가고, 그 때 시골에서는 사돈댁으로 보내기에
빈손으로 보내지 못하고 떡을 조금해서 보냈습니다.
그러다 1년여가 되고 시댁으로 처음 오는 것을 신행이라 했는데, 신행날을 양가간에 의논을 해서 정했습니다.
신행 온 뒤 처음으로 가는 친정길은 첫친정이라 했습니다.
결혼식을 올리고 1년여가 지났지만, 신부가 시댁으로 처음 오는 그 신행날이 신랑집의 결혼식 잔치 날이였습니다.
사돈이 딸을 데리다 주러 오시는데, 그 때 채리는 사돈 접대상이 큰상이라 불렀고, 산해진미는 아니였어도,
그 때 살림살이로서는 한껏 격식을 차려서 내는 큰 상이라 그 대접 정도로 사돈댁의 살림 정도와 그 위세를 가늠 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년여를 묵혀서 오다 보니 손주를 낳아서 데리고 오는데, 밖에서 낳아 오는 자식이라고 액땜을 면하라고 아기를 개구멍으로 들이 밀고,
안에서는 받아 안고 그렇게 했습니다.
개구멍은 소통이기도 했고, 개구멍으로 들어 와도 대문으로 들어 오는 낯선 사람이 아니고, 이미 들어 왔던
내 집 사람이 삽작문을 열고 나가는 것인척 귀신 속이는 일 중의 하나였지요.
신행을 오는 신부는 삽작문 앞에서 슬쩍 액을 물리치는 작은 짚불을 밝고 지나오고, 바가지도 밟아 깨고 들어 오고,
그도 귀신을 속이는 일이지요.
딱이 속인다기보다는 매사에 정갈한 맘으로 시작하고 새 집의 신들에게 고하는 것이라 생각 해서 하는 일이였을 겁니다.
삽작문은 구조상 문골이 없는 자유자재의 문이였습니다.
아침에 가장이 붐하게 날이 새기 시작할 때 가래 하나 메고 집을 나설 때 약간 들듯이 열어 놓고 나가는
참 자유자재의 문이였습니다.
그래도 경계의 의미가 있어서 삽작문은 언제나 닫고 잠을 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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