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살기 위해 멀건 풀죽도 먹었다고.

이쁜준서 2016. 8. 10. 21:07


반 백년이라면 50년

2016년 싯점에서 보면, 1960대 후반 쯤인데, 그 때부터 참 쏜 화살보다 더 빠르게 세상은 변했습니다.


1950년대 전쟁이 일어나고,(6.25전쟁)

경북 의성에서 경북 자인까지 첫아이 임신해서 걸어서 걸어서 피난 길에 나셨셨다 합니다.

남편은 전쟁에 나가 있고, 시어머님과 시동생과 셋이서 피난  길에 나섰는데, 임신을 한 몸이라 피난 대열에서 혼자 처져서

가는데, 인민군을 만났고 서라고  총으로 가리켜서 섰더니 임신한 것을 알고 가라고 했고,

피난 간 곳에서 추석을 쇠고 고향으로 돌아 올 때는 만삭의 몸이라 식구들은 앞에 갔고, 혼자서 터널 터널 쉬다 걷다 하면서

오는데, 이번에는 미군이 잡아 세우고 보더니 만삭의 몸이라 총으로 밀면서 가라고 해서 고향을 5리 남겨 둔 곳까지 오니

키우던 개를 그 오리 남겨둔 곳에서 개를 만났다 합니다.


집에 오니 시어머님께서는 간장, 된장 독에 장은 남아 있었는데, 독을 탔는지? 먹어도 되는지?를 알 수 없어서

물에 된장을 희석하고, 간장을 희석해서 개를 주었더니 개가 먹었는데도 탈이 없어서 먹어도 되겠다 짐작을 했다고 합니다.

개는 전쟁 중에 정지간에 땅을 파고 새끼 2마리를 낳아 놓았던데, 어미개도 얻어 먹을 것이 없고, 그런 에미에게 젖도 제대로

못 얻어 먹어서 어미개도 강아지도 털이 하나도 없는 상태더라 했습니다.


먼 곳에서 왔다는 사람이 이런 개가 약이 된다면서 그 전쟁 직후에 그 때로서는 큰 돈을 주고 개 3마리를 가지고 가서

개 판 돈과, 항아리에 보리 두 가마니를 넣어 땅에 묻어 놓고 갔던 것이 까맣게 섞어 있어도 그런대로 디딜방아에 찧어서

들에는 쇠비름이 고사리처럼 말라 있는 것을 뜯어다 삶아서 보리가루 넣고 멀겋게 죽을 끓여서 그 해 겨울을 넘기고,

그 이듬해 보리 농사 지어 보리 수확할 때까지의 보리고개도 연명할 수 있었다 하셨습니다.


그 시절에 앞으로 50여년 후에는 지금 우리들이 누리고 사는 이런 세상이 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입맛대로 먹고  사는 세상입니다.(물론 아직도 배 고픔을 해결 못한 사람들도 있지만요)

어느 때는 외식으로 고기를 구워 먹으러 나가는 것이 자랑거리가 된 때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고기는 많이 먹으면  건강에 해롭다고 합니다만,

이제는 고기야 큰 마트에 가면 동네 시장에 하나나 둘 있던 정육점이 연이어서 마주보고 아마도 3~6개 정도가 될 것입니다.

한우고기, 돼지고기, 미국 수입고기, 호주 수입고기, 돼지고기도 수입육이 있고, 이쁜 소비재를 진열 하듯이

부위별로 참말로 눈길 끌게 진열 되어 있습니다.


돌아 서면 코다리, 칼치, 오징어 반건조 어물들, 몇 발자국 앞으로 나서면 싱싱한 어물이 진열한 곳에서 고르면

잽싸게 내장 빼고  물로 씻어서 토막내어서 소금간 해달라면 소금간 해주고 그냥 달라 하면 그냥 주고,

조개며, 오징어며, 해물탕거리등등 참 많고도 많습니다.

나물도, 열매 채소도 초여름부터 수박이며, 과일도, 수입 열대 과일도 입맛대로 있습니다.


먹고,입고,  각종 가전제품이 돈만 들고 나서면 없는 것이 없는 세상이 되고 보니,

그에 필요한 돈 벌기가 소비가 높아져서 수입도 높아 졌지만,  그 소비에 따라 잡기가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어린아이 키우는 집에서는 책도 사 주고 장난감도 사주고, 때 되면 걸 맞은 놀이도 다녀 와야 하고, 학원도 보내야 하고,

그 어린아이들 키우는 세대가 우리 자식 세대입니다.


힘 든것 내색하는 자식도 있을 것이고, 내색하지 않은 자식도 있겠지만, 세상 돌아 가는 것을 보면,

많이 벌면 버는 것만큼 소비가 더 많으니 우리 자식 세대는 늘 힘겹게 살아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까지 옥상 일을 마쳤고, 집안의 일을 사브작 사브작 거리고 했습니다.

가스렌지야 늘 닦지만, 후드도 빼어 내고 씻고, 닦고, 반찬 몇가지 만들고,  윗도리 옷이 앞 쪽은 다 젖었습니다.

예전 우리 어머님 세대가 피난 갔다 만삭의 몸으로 타박 타박 걸어 오셔서, 들에서 고사리처럼 마른 쇠비름을 베어다

씻어 삶아서 그 나물을 넣고, 된장을 풀어서 시커멓게 섞어진 보리를 디딜방아로 찧어서 죽을 끓여서 연명 하셨던 것에 비하면

실내에서 덥다 덥다 해도 땡볕 아래도 아니고 더운 것도 아니다 싶었습니다.


고향으로 만삭의 몸으로 돌아 와서 아기를 낳았는데, 먹는 것이 변변하지 못해서 젖이 나오질 않아서 그 갓난쟁이 아기에게

죽을 끓이는 억센 보리가루를 끓여서 무병베 보자기에 짜서 먹였는데 그 갓난쟁이가 그것을 받아 먹더라 하셨습니다.

살려는 목숨이라 먹었고, 또 그래서 갓난아기가 살았지 싶습니다.

그 갓난 아기가 올 해 67세 입니다. 준서할미는 아닙니다.

오늘 덥다고 안부 전화를 드린 집안 어르신의 말씀이셨습니다.


준서할미가 새댁 시절에는 시백모님도 오시고, 시고모님도 오시면 따뜻한 점심 한끼니 잡수시고, 가시고,

명절에  큰 아들집에 오셨다가 명절 쇠고는 우리 집에 오셔서 하룻 밤 주무시고 가셨습니다.

집안에 시동생 2명, 시뉘 1명 결혼 날을 앞 두고 시백모님, 시고모님, 종고모님과 오촌당숙까지 오시니, 그 어르신들 모여서

하시는 옛날 지나온 날들의 이야기는 젊었던 준서할미에게 재미나고, 결혼식을 앞 두고 집안 어른들께서 함께 주무시면서

낮이면 막걸리 한 주전자 받아  잡수시면서 술이 챈다 싶으시면 그 때부터는 이야기가 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 부모님대 어르신들 중에는 이제 몇분 계시지 않습니다.

글자로서 이야기로서의 먹고 살기 어렵다는 것을 읽고, 이야기 들었던 세대가 준서할미 세대라면, 몸으로 직접 겪으신

세대가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십니다.


참 아련한 이야기를 오늘 들었습니다.

맘이 석양무렵처럼 쓸쓸 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