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가슴이 돌에 짓눌린 것 같은 느낌....

이쁜준서 2009. 8. 18. 00:46

50년대 초등학생이었고, 60년대 고등학생이었고, 70년대 시동생, 시뉘가 중학생이어서  학부형의 자리였었고,

가난이라면  우리나라가 다 가난했고, 50년대 부산은 왜 그리 상이병사도 많았고, 문둥병을 앓는 사람도 많았던지...

학교에서 주는 급식 분유을 받아 왔고, 학교에서는 따뜻하게 물에 태워 주는 우유도 먹어 보았던, 그런 세대가 준서할미 세대이다.

그래도 우리들 먹여 주시고 보호 해 주시는 우리 부모님 세대보다야 고생을 덜 했고, 배고픔도 그리 겪지 않았다.

 

우리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지금처럼 분기별이 아니었고, 다달이 내는 월사금이라 불렀다.

그것을 제 때에 내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교무실에는 서무실에서 작성한 그날 그날의 월사금 통계표가 있었고, 담임선생님들에게,

교감선생님은 독촉을 하셨고, 담임선생님들도 저녁 조회시간에는 월사금 독촉을 하셨다.

빤히 딱한 사정은 묻지 않아도 알기에 독촉을 못하시는 담임반은 월사금을 제 때에 내는  학생이 적어서 늘 교감선생님께,

능력부족이라는 눈총을 받고, 실제 그 반 담임선생님께서는 싫은 소리도 들어셨다.

시험 때 서무실 직원이 각 반으로 돌아 다니면서 월사금 내지 않았던 사람을 불러 내어서 시험을 못 치게 하기도 했었던 그런 세월이었다.

준서할미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불러 내어 세워 놓았다, 다시 들여 보내어 주었는데, 자존심 센 준서할미는 감독선생님 뵙기가 면구스러워 아예 집으로 와 버린적도

두어번 있었다.

 

저번 주에 그 시절보다 더 가슴이 돌에 짓눌린 것 같은 그런 감정으로 TV 를 본 적이 있다.

동행이라던가? 프로그램의 정확한 이름은 기억에 없다.

초등학생 아들 둘과 막내 딸아이를 둔 한 어머니와 그 가족의 이야기였다.

그 어머니는 어느 식당에서 그릇을 씻는 일을 하고 있었고, 월급이 80만원이 못 되었다.

중간에 보았는데, 아이들이 어느 모텔방에 있었고(여관이었다), 모텔에도 숙박비를 못내고 있으니 나가라는 말을 듣고 있었고,

하루만 더 봐 주면 내일은 나가겠다 약속을 하더니 그 엄마 일 끝나고 밤 늦게 와서는 아이들 양말이고 옷이고 손빨래를 하고 있었다.

내일이라도 길거리에 나 앉으면 이것도 못하니 준비를 해야 한다면서,

모텔의 숙박비도 내지 못하고 있으니 양말등등 손으로 꼭 짜서는 실내 여기 저기 널어 놓았다.

월급 받은 돈으로는 빌려 쓴 돈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갚아야 하고, 여관방 값도 내어야 하고, 아이들 밥도 먹여야 하고...

모이는 돈이 없고, 늘 부족한 형편이었다.

 

결국 숙박을 했던 여관방에서 엄마가 출근길에 가방을 하나씩 둘러메고 나와서는 어느 공원 벤취에 아이들을

두고 가방을 잃어버리면 않된다 하고는 일을 하러 갔다.

아침겸, 점심겸 컵라면 2개로 셋이서 떼우고 막내 여동생이 배가 아프다고 하니 오빠 둘이서 자기들 몸에 여동생을 누이고,

오빠손은 약손이라던가? 큰아이가 여동생 배를 만져 주고 있었다.

늦은 밤 식당에서 밥과 반찬을 얻어 온 엄마가 와서야 저녁을 먹고,

아이들은 엄마것을 남기고 엄마는 아이들이 남긴 것이라 그 밥을 먹는 장면도 있었다.

낮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는 있는데, 걱정이 태산이고, 아이들이 걸려서,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기에 몇일을 먹지 못했던 그 엄마였다.

남편과 이혼을 한 모양인데, 남편은 아이들 보조도 해 주지 않는 모양 이었고, 갈 곳이 없으니 짐을 가지고 오지 못하고,

자기가 살았던 아파트 건물 구석진 곳에 이불이고 옷이고, 물건들을 두고 있었고, 비도 맞았고, 손도 타고 그래었다.

 

그 구구절절한 것을 보고서 가슴이 돌에 짓눌린듯 참으로 멍멍했다.

아이들을 쉼터에 맡긴 적도 있는데, 큰 아이 말이 밥을 굻어도 엄마랑 살고 싶다하고, 아이들이 기가 죽어서 그 후로는 쉼터에

맡길 수가 없다 했다.

어찌 어찌 이웃의 도움으로 지하 아주 작은 방을 구하게 되었고, 그 엄마는 새벽 신문돌리기를 하고, 아들아이 둘은

광고지를 돌리고, 그렇게 안정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아이가 한 아이라면 그 엄마가 그 지경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라 생각도 해 보았다.

어쩜 한사람의 식사거리도 모자라는 것을 세 아이가 나눠서 먹는다 해도 셋이 서로 서로 염려 해주고 기댈 수 있어,

셋이어서 더 나은 것일까? 도 생각해 보았다.

그 엄마에게는 부담도 세배라면 희망도 세배일 것이다.

 

꼭...꼭.....

그 아이들이 반듯하게 살아서 지난 일 이야기하면서 그 엄마랑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하는 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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