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결혼식에 부조라는 것.....

이쁜준서 2009. 6. 20. 14:51

 

 

요즈음의 결혼식은 결혼예식장에서도 하고, 호텔예식장에서도 하고, 븨폐음식을 팔면서 운영하는 예식홀에서 한다.

점심시간을 훌 넘긴 오후 늦은 시간이 아니라면 거의 식사 대접을 하고 있다.

준서에미 결혼식 때만 해도 예식장에서 운영하는 식당의 메뉴는 비빔밥도 있었고, 갈비탕도 있었고, 뷔폐음식도 있었는데,

요즈음은 거의 븨폐음식인 듯 하다.

예식홀을 계약 할 때 식사도 1인당 얼마라고 예약을 하는 것이다.

200명을 예약하고 손님이 더 추가 되는 것은 추가된 인원수 만큼 식사비용을 더 주면 되는데, 혹여 손님이 덜 와도, 예약한 인원수의

식사비용은 주어야 한다.

 

 

1950년대 ~ 1960년대는 예식장이 버젓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주로 교회나 성당에서 화동이 꽃잎을 뿌리고 앞서고 그렇게 신식결혼식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 때는 전통혼례를 더 많이 했을 것이다.

전통혼례는 신부집 마당에서 혼례상을 차려 놓고 지금 향교에서 하는 전통혼례처럼 그렇게 혼례식을 올렸다.

그렇게 신부집에서 혼례식을 올리고, 시골에서는  바로 시갓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한 1년씩 친정에서 신부는 묵었고,

보통 1년이 지나 시집으로 올 때는 아이도 하나 낳아 오기도 했는데, 액을 물리친다고 삽작 앞에 불을 피우고 그 불을 건너

신부는 삽작으로 들어가고 아기는 울타리 사이로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아기를 집 마당으로 들였다.

개구멍으로 받은 자식이라 액땜을 했기에 건강하게 아기가 자라기를 바래서 그랬지 싶다.

준서할미는 초등학교 시절이었고, 그런 모습을 보았었다.

 

 

1970년대에는 혼인식을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는 향교에서 전통혼례를 하기도 했지만,  거의 예식장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하는

그 때는 신식결혼식이라 불리는 그런 결혼식을 했다.

준서할미도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했었는데, 고향에 계시던 숙부님께서는 3층으로 된 예식장 전체 예식홀과 신랑, 신부 대기실로

돌아 보시고는 자식 낳아 평생에 인물 자랑하는 곳이다 하셨다.

신부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랑은 말쑥하게 양복을 입은 모습으로, 화동을 앞세우기도 했었던 모습이었다. 

1980년대, 1990년대, 2009년인 지금까지 예식 홀에서 하는 예식의 모습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거의 같겠지만,

2000년대 들어오면서 바꾸어 졌다면, 신랑들이 분장수준의 화장을 하고, 턱시도를 입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 것이다

 

 

또 다르게 바꾸어 져 온 것이라면 하객들의 식사 대접이 이다.

준서할미가 1970년대에 결혼식을 올렸고, 시뉘는 1980년도 전반에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 때는 예식장에서는 예식만

올리고 예식장 앞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지 아니면 하객들을 집으로 오시게 해서 식사 대접을 했었다.

예식장 앞의 식당에서는 밥, 술, 음료수만 팔았고, 혼주가 집에서 떡이며, 묵이며, 약밥이며, 무침회을 준비해 가서

혼주의 친구들이 가서 음식을 놓아주고(가방을 본다고 표현함) 그렇게 손님 접대를 했다.

집으로 손님을 모시고 오면 한참에 하객들이 들이 닥치고, 아무리 미리 준비를 했다고 하나 한번은 북새통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중반이 되면서 예식장이던 예식홀이던 자체적으로 식당을 두고 결혼식 계약을 하면

식사도 몇인분 이상부터 각 가정에 맞게 인원수의 식사 예약도 함께 하게 되었다.

물론 집에서 음식을 가지고 가는 것은 없고, 또 그렇게 몇년 지나오면서 가까운 친지를 집으로 다시 오게 하던 것도

없어지고 예식장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면 뿔뿔이 자기 집으로 가게 되었다.

세상살이가 바쁜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아직 준서할미 친척들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오는날이거나, 친정에 들려 시집으로 색시가 오는 날  저녁 시간대에 다시 모이기는 한다

 

 

옛날 고향에서 전통혼례를 올리던 시절에는 부조라는 것이 돈으로 하는 것은 드물었다.

형제자매이건 아버지나 어머니의 형제분들이 몫돈이 들어가는 것을 맡아 해 주셨다.

그 외는 단술, 묵,등등의 잔치에 쓰여질 음식을 서로간 부조로 해 주었다.

요즈음은 부조를 거의 돈으로 한다.

 

그러다보니 정말 가야하는 잔치인데도 친구중 자녀가 다섯인 친구의 넷째 딸 결혼식이 오늘 있는데도,

자기 형제들만 참석한다면서 초청을 하지 않았다.

오늘이란 날자만 풍문으로 알았지, 장소도 시간도 모른채로 우리들은 참석을 하지 못했다.

30년이 넘은 친구들이고, 아직도 매달 만남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되어지니, 30년도 더 된 친구가 그렇게 돈으로만

계산 될 것인가?  하고 친구들이 맘을 상했다.

신부 엄마인 친구를 이해 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백혈병으로 작년 1년은 화학치료등 암울한 시간을 지나 왔고, 이제는 정기 검진만 받고 일상으로 돌아 왔지만,

결혼식이란 것이 빈손으로 오는 것도 아니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

 

결혼하는 신부가 태중에 있을 때도, 중학교 입학하기까지 자라는 모습도 자기들 형제보다 더 보아 왔고,

안고 업고도 했던 아이라서 친구들이 섭섭하게 생각함도 잘 안다.

 

돈으로 부조를 하지 않았던 예전의 잔치는 그야말로 동네 잔치였다.

집성촌이기도 했지만, 그 동네 누구나 잔치집으로 가 식사와 술과 떡을 먹을 수 있었는데,

세상이 바뀌어 지면서 인심도 야박해진 것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우리가 흔하게 보았던 홑 채송화에는 다섯개의 하트꽃잎이 모여서 하나의 채송화 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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