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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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답지 않은

이쁜준서 2023. 2. 20. 06:11


나는 참 엄하게 훈육을 받았다.
우리 세대들 특이나
시골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했다.
당연 그래야 되는 줄 알아서 4월 언손 호호 불면서 밭둑으로
논둑으로 호미들고 흐르는 물에 넣어도
되는 길쭉한 싸리 소쿠리에 풀을 캐면 소쿠리채로 일렁일렁 해서 씻어서 왔다.
집에 부어 놓고 다시 가는데  4월 중순이 넘어서 따뜻 해지면아기 업고 가라하니
도둑질 하듯 발자국 소리 죽여 캐 온 풀 부어 놓고,
동네 또래들과 약속 되어 있어 발자국 죽여 돌아 나와 삽작문을 나서면 냅다 뛰었다.
남자아이들은 풀캐러 보내지 않은
남녀차별도 많았고.
아이들을 그 추운 꽃샘 추위에 보내는 것은 쇠죽을 끓이는데
더 맛나게 해 준다고
아이들을 내 보내는 것이 당연시 되는 세월이였다.
봄풀을 넣지 않았다고 소가 쇠죽을 안 먹는 것은 아닌데도,
그 당시 소는 재산 중의 하나라 어린 여자
자식 호호 불면서
풀을 캐라고 하셨다.

그런중에 훈육이 엄해서 억울하게 혼나도 아니라 하면 말대꾸 한다고 혼났으니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랐으니
반듯하게 자라서.
반듯한 어른이 되었다.
이 동네로 이사를 와서 토지개발에 보상금 받은 묵힌 논에
미나리가 파랗게 딱 나물하기 좋은 크기로 자라 있어 전에 살던 동네 친구에게 연락을 했더니 친구
2명이 왔는데.
한 친구갖 남편이 미나리는 더러운 곳에 많은데 가지마라 해서
나한테서 연락이 왔다하니 그러면 깨끗한 곳 맞다고 하더라고,
다른 친구는 어디 가는 것을 싫어 하는데
나하고 만나서 간다하면 아무말 하지 않는다고

그런데도 나 답지 않은 것은 누가 바람나서 아이들 버리고
도망 갔다고 다 욕을 해도,
미치도록 좋아해서 그랬겠지로 동정심이 일었다.

일평생에 그런 사랑만나는 것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불쌍 했었다.
그런 사람 두 사람을 보았는데
끝내 잘살지 못하고 죽으라 고생하고 살고 에미가 버리고 갔으니 그 자식들도 고생하면서 자랐고.

내가 초등고학년
3년을 살았던 아버지 고향의 소풀 캐던
그 들판은 공단으로 들어 간지 오래 전이라 그 때의 풍경은 하나 없었다.
이제 노년의 할머니가 되어 화분에서 식물을 키우고, 화분의
풀을 뽑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