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7월의 꽃

정직한 맘은 배고프다는 것처럼 단지 한가지 일 뿐이다.

이쁜준서 2015. 7. 5. 17:26

 

 

준서할미가 어려서부터 자라온 과정에서,

가정교육이란 말을 쓰지 않았고, (가정) 훈육이라 했고,

학교에서 공부를 배우는 것 말고, 일반 일상사에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가르치는 것은 학교 교육이라 말 해 왔다.

 

우리들이 자랄 때는,

6~7살만 되어도 동생을 데리고 놀아야 했고, 대 소변의 볼일도 다 해 주어야 했었다.

할머니, 엄니 하시는 일을 보면서 익힐려고 한 것이 아니고, 어느 날 엄니도, 할머니도 계시지 않아서,

7살 어린아이가 밥 솥에 밥도 하게 되고, 저녁 밥 먹고, 엄니 아기 동생 보살피시게 되면 자연스럽게 어두 컴컴한

마당 한켠에서( 여름에는 마당에 솥 걸어 놓고, 밥을 했으니) 설겆이도 하게 되고,

겨울 날 고구마가 먹고 싶으면 솥에 싸리 채반 얹고 7~8살 어린아이도 고구마 쪄기도 했었다.

단지 먹고 싶어서.

 

초등학교 4학년만 되면 소풀도 뜯으러 다니고, 풀이 들에 무성하게 자랄쯤이면  소를 몰고, 들로 야산 들입으로

동네 또래들과 소 풀 뜯기러 다니고,

어느 집이라도 형편이 같아서, 집에서 또래들이 일 할 때는 다 그만 그만한 일을 하고 자랐다.

그렇게 생활 속에서 일도 배웠고, 훈육도 받으면서 자랐다.

 

4월에 준서네에 가서 옷을 사러 갔다가 커피 한잔씩 뽑아서 앉아서 먹는다는 것이 고객센터 앞 의자였는데,

고개를 돌리니 빨간 지갑이 하나 놓여 있었다.

커피를 마실 때까지도 주인이 찾아 오지 않았고, 세상이 하 인심 사나워서 넘의 물건 손대기 싫어서,  고객센터로 들어 가서

직원에게 빨간 지갑 하나가 있다고 이야기 하고 그 직원이 들고 들어 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를 떴다.

 

거래를 오래 한 도소매 시장의 어물 가게에서 몇몇가지 생선을 사고, 달라는 대로 돈을 주고 사 왔는데,

집에 와서 챙기면서 돈을 계산 해 보니 10,000원을 상인이 잘 못 계산해서 덜 달라고 했다.

2주 정도 있다가 그 도소매 시장을 가게 되어서 가서 돈 10,000원을 주고 왔다.

 

상인은 요즈음은 오징어 한 박스 팔아도 10,000원이  남지 않는데, 정말로 고맙다고 했다.

상인 입장에서야 고마운 일일 수도 있지만, 준서할미 입장에서는 당연하게 주어야 할 돈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 돈을 주었는데,

혹여 여기 돈 떨어진 것 보셨냐구 찾아 왔을 때 주었다면 당연하게 돌려 드리는 것이 맞은 것이지,

돌려 드리는 것이 양심적인 것이 아니다.

블로그 글에서 종종 보이는 것으로, 그 당연한 일을 참 양심적이다고, 본 받을 일이라고 하고들 있다.

배가 고프다는데 그냥 먹는 것을 주는 것이 당연한 것인 것처럼,

 

내것이 아니면 돌려 주어야 하고,

내가 잘못해서 낭패 보게 되었다면 물어 주어야 할 형편이면 물어 주어야 하고,

내 부모님께도, 그 순간을 모면할려고, 어린아이 때도 거짖말을 하지 않게 훈육을 해야 한다.

 

준서할미 8살 어린아이인 때, 엄니는 교회에 가시고, 점심 준비한다고, 정지간에 들어가서는(재미로 그랬겠지)

그 당시로는 꽤 값나가는 아주 큰 쟁반을 실수로 떨어뜨려서 박살이 나게 했다.

같은 집에 살고 계시던 아주머니 큰일 났다, 엄마 오면 혼이 날 것이다 하셨고,

8살 어린아이의 대답은 우리 엄마는 거짖말만 않하면 혼 내지 않아요라 했고,

 

엄마 돌아오시니,

저그 간 크다. 그 큰 쟁반 깨어 놓고도 거짖말만 않하면 혼 나지 않는다하고 겁도 내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엄마  하시는 말씀이 않 다치고, 거짖말 하지 않았으니 되었다 다음에는 조심해라 하셨다.

그 시절이 궁핍했던 50년대 였는데,

우리 엄니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자존감 있게, 훈육하셨던 것이다.

그러시면서 우리 엄니는 엄하셨기도 했었고.

우리 외할아버지께서는 식구들을 솔가해서 일본에서 위로 세 자식을 결혼시켜서 해방 되고 한국으로 나오신 분이신데,

우리 엄니 형제분들은 늘 정직한 사람 머리에는 신이 가호하신다는 뜻의 말씀을 일본말로 하셨다 한다.

 

우리 아이들을 준서할미가 자랄 때와는 세상이 변해서 내가 자란 것과 똑 같이 엄하게 기른 것은 아니지만,

우리 아이들 또래들보다는 엄하게  키웠다.

역시나 정직한 것이 제일이었고.

친척들이 왔다 가실 때이면, 언제나 3층 집에서 대문까지 배웅을 해야만 했었다.

 

내것이 아닌 것을 주웠다면 주인에게 돌려 주는 것이 지당한 일이지, 양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계산을 잘 못 해 왔다는 것을 알았다면  바로 계산 해 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정직한 맘으로 어려서부터 자라면, 성인이 되어서도 내 양심을 속이지 않아도 된다.

 

아기 준서를 키울 때는 3~4살이였고,

방학 때면 와서 장기간 데리고 있었어도, 7살 8살 준서를 밥을 떠 먹이고, 밥상 밑으로 기어 다녀도

하지말란 말도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에미가 너무 바뻐서 그 나이대의 아이들처럼 받들어 주지 못하고,

엄마가 바쁜 줄을 잘 알고 있으니 건조대에 널렸던 빨래감 걷어 정리 할 때엔,

5살 준서는 수건을 접는 것을 하드라면서 사진을  그 때 블로그에 올려 주어서  보았는데,

 

여즘 어린아이들은 하지말란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두고 같이 놀아 주면 스스로 하는 아이로 자라는 것을.

 

오늘은 그런 준서가 무척 보고 싶고 생각이 많이 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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